피의 과월절(過越節)-Pasque di Sangue-Passovers of Blood
제목이 좀 섬찟하지요?
지난 2월 8일에 이스라엘의 역사학자인 아리엘 토아프(Ariel Toaff)가 이탈리아에서 출판한 책의 제목입니다. 그런데 이 책이 출판되기 이틀 전에 이탈리아의 유력 일간지인 꼬리에레 델라 세라(Corriere della Sera)지에 서평이 실리고 그 서평 때문에 이 책은 판매가 채 시작되기도 전부터 엄청난 논쟁과 비난에 휩싸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로  판매 시작 일 주일 만에 저자는 이 책을 서점으로 부터 회수해 줄것을 출판사에 요청하기에 이릅니다.
 
그렇다면 과연 이 책의 내용이 무엇이었길래 일주일만에 판매를 중지하는 사태에까지 이르렀을까요? 이 책의 제목에서 말하는 과월절(혹은 유월절 Passover) 은 유태인들이 모세의 인도에 따라 이집트를 탈출한 것을 기념하는 유태인들의 큰 명절입니다. 그러면 이 과월절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저자의 주장은 15세기 유럽의 유태인들 중 일부가 과월절을 지키는 과정에서 기독교도 어린이를 죽이고 그 피를 받아 과월절에 쓰일 빵을 반죽하는데 썼다는 것입니다. 결국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일종의 희생 의식을 행했다는 것이지요. 물론 저자의 주장은 반드시 그랬다는 것이 아니라 그랬을 개연성이 높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주장의 근거로서 15세기 이탈리아의 트렌토에서  열린 재판 기록을 들고 있습니다. 이 재판은 시모네(Simone)라는 한 어린이를 살해한 혐의로 기소된 유태인들에 대한 것이었는데 이 재판에서 사용된 심문 기록을 검토하며 저자는  피고들의 증언 가운데   직접 그러한 행위를 하지 않고서는
결코 말할 수 없는 내용들이 들어 있다는 주장을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내용들을 토대로 일부 근본주의(Fundamental) 아슈케나지파 유태인들(Ashkenazi Jews) 이 기독교도들에 의해 박해 받은 것에 대한 보복으로 이러한 희생의식을 했을 수도 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런 식의 주장이 우리에게는 낯설게 들릴지 모르겠습니다만 서구에서 유태인들에 대한 위와 같은 주장은 오랫 동안 있어 왔습니다. 최근에 개봉되었던 '보랏' 이란 황당한 영화를 보면 서구인들이 가진 유태인에 대한 이미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 있습니다. 흡혈귀, 악마 등등  종교적으로 본다면 이단과 연결이 된 이미지를 가지고 있지요. 하지만 이러한 유태인에 대한 좋지 않은 이미지는 2차 대전 동안 이루어진 나찌의 유태인 대학살이 알려지면서 많이 감소되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이런 주장을 하는 책이 나왔으니 먼저 유태인 사회에서 난리가 나겠지요. 더구나 그 저자가 이스라엘에서 역사를 가르치고 있는 유태인이라니, 그리고 저자의 아버지는 이탈리아에서 가장 유명한 랍비 중의 한 사람이었으니, 이 책은 스캔달이 될 소지를 다분히 가지고 있었습니다. 책과 관련된 서평 및 기사는 거의 대부분이 부정적인 것 일색이었고 결국 저자는 책의 전량 회수를 요구하였습니다.

저자는 자신의 의도가 언론을 통해 잘 못 전달되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위에서 소개한 표지의 경우 마치 한 유태인이 어린이를 제물로 바치는 것 같이 보이지만 사실은 구약 성서에 나오는 아브라함과 이삭의 이야기를 실은 판화입니다. 하지만 출판사에서는 저자와 상의도 없이 그 판화를 표지로 사용함으로써 책의 내용을 오해하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최근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의 관계가 악화되면서 이스라엘의 무자비한 군사작전에 대한 국제적인 비난이 비등하고 있는 가운데 이런 책이 나왔으니 이 책은 정치적으로도 해석될 수있는 문제였습니다.  일부 이스라엘 인사들은 저자를 재판에 회부하자는 이야기까지 하고 있다고 합니다. 다들 잘 알고 계시겠지만 보통 때는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지만 한 번 문제가 되면 '역사'는 무서운 힘을 발휘합니다.

제가 이 책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가깝게 지내는 노교수님 한 분이 지난 2월에 저를 찾아 와서 이 책에 대한 이야기를 하시면서 혹시 우리 도서관에서 구입할 방법이 없겠느냐? 만일 구입이 어렵다면 상호대차를 통해 다른 도서관에서 빌려올 수는 없겠냐고 물어 보면서 부터였습니다. 이미 책이 회수된 상황에서 당연히 두 가지 다 불가능한 일이었고 저는 이탈리아 신문 몇 군데에 실린 서평을 찾아 드렸습니다. 

그런데 지난 주에 다시 저를 찾아 오셔서  "자네  그 뭐냐, 이베이 인가, 이바이인가 하는 것 아는가?" 하고 물어 보시더군요. 그래서 "이베이 말씀이군요. 아닌게 아니라 지난 2월에 제가 찾아 보니 벌써 이베이에 그 책이 올라와서 비싸게 팔리던데요. 25유로에 팔렸던 책이 그때보니 벌써 100 유로가 넘어가던데요."  그러자 그 분이 "아니 그럼 왜 그 때 말해주지 않았나?  지금이라도 내가 찾아 봐야겠구만" 하시고는 이베이에 입찰을 할 기색이더군요.
참고로 이 노교수님도 유태인입니다. 그리고 저자와도 잘 알고 있다고 말씀하시더군요.

마침내 오늘 아침 그 분의 이메일이 왔습니다. 300 유로에 그 책을  이탈리아 이베이에서 샀고  책이 오는 중이라고 그리고  자신이 다 보고 나면 도서관에 기증하겠다는 말씀까지도 하시더군요. 글쎄요. 기증을 해 준다고 해도 걱정입니다. 점점 가치가 올라가는 이 책을 일반 서가에 놓을 수도 없고 또 깐깐한 유태학과(Judaic Studies) 교수님들이 그냥 두고 보고 있을지..   하지만 적어도 저는 그 책을 읽어 볼 수 있겠지요. 도서관에서 일하는 덕을 이럴때 보는 거지요. ^^  기다려집니다.

* 혹시 이 책에 관심이 있으신 분들은 아래의 블로그에 가보십시오. 책과 관련된 각종의 기사와 서평을 모아 놓고 있습니다. 대부분 이탈리아어이지만  영어 기사도 좀 있습니다. 
15,16세기 이단에 관한 한은 아마 최고의 권위자로서 한국에도 '치즈와 구더기'로 잘 알려진 카를로 긴즈버그(Carlo Ginzburg) 교수도 아주 예리한 서평을 발표했습니다.  안타깝게도 이탈리아 어인데 그 분의 말씀 중의 한 가지는 심문 기록은 매우 주의 깊게 살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고문을 받는 피고는 결국 심문자가 원하는 것을 그대로 말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지요.안타깝게도 우리에게는 너무나 상식적인 이야기입니다.
http://tonibaruch.blogspot.com/2006_02_01_archive.html    
by Clio | 2007/03/13 14:55 | 역사이야기 | 트랙백 | 덧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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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marlowe at 2007/03/13 17:51
언제나 깊이와 재미가 함께 있는 글을 올려주셔서 잘 읽고 있습니다.
역사를 다룰 때는 아무리 조심해도 지나치지 않겠지요.
그러나, 자신들에 대한 비판에는 무조건 반유태주의와 인종차별로 몰아가는 유태인들도 문제는 있습니다.
그리고, 그건 우리에게도 해당하는 이야기겠죠.
Commented by Clio at 2007/03/14 13:57
marlowe 님 / 역사에 관해서는 누구나 한 마디씩 합니다. 그리고 자신과 관련된 역사에 대해서는 더욱더 예민하지요. 그런 의미에서 객관적이고 공정한 역사란 블가능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안타깝게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호응을 얻는 주장을 하느냐가 관건일 수 있겠군요. 하지만 그것이 진정으로 과거에 일어난 일을 주장하는지는 또 다른 문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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