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과 역사
켄번즈(Ken Burns)는 현재 미국에서 활동 중인 대표적인 다큐먼타리 감독의 한 사람입니다. 일반 극영화계의 스티븐 스필버그와 비교할 수 있을 만큼 다큐먼타리 영역에서 그의 활약은 대단합니다. 특히 역사적인 인물이나 사건을 주제로 한 역사 다큐먼타리 영역에서 켄번즈는 독보적인 존재입니다. 야구(Baseball), 재즈(Jazz), 그리고 남북전쟁(Civil War) 같은 장편 다큐먼타리를 통해서 Ken Burns Style 혹은 Ken Burns Effects 라 불리는 독창적인 표현법을 소개하기도 했지요. 그러한 켄 번즈가 지난 몇 년간 준비한 새로운 장편 다큐먼타리 "The War" 가 최근 미국의 안방극장에 찾아왔습니다.

2차 세계 대전을 주제로 만들어진 이번 다큐먼타리가 제작되는 동안에도 이런 저런이야기들이 있어 왔고 또 켄번즈라는 천재적인 이야기꾼이 어떤 이야기를 만들어냈는지 궁금하여 열심히 보고 있습니다. 역시 기대했던대로 역사 다큐먼타리의 대가로서 명성에 손색이 없는 작품을 만들어 낸 것같습니다. 이 다큐먼타리에서 켄번즈는 2차 세계 대전을 주제로 하여 유럽 전선과 태평양 전선 그리고 미국 국내의 상황을 교대로 보여주면서 전쟁에 참여한 미국인들의 모습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 작품에서 제가 특히 관심을 가진 부분은 전쟁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방식인데,  켄번즈는 유력한 정치인이나 유명한 장군들의 일화를 통해서 2차 대전의 역사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전쟁을 직접 경험한 군인들이나 그 가족들과 같은 일반인들을 주인공으로하여 전쟁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보통 사람들의 입을 통해 전쟁의 참혹함과 그 속에서 일어난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유럽 전선에 참전했던 한 일본계 미국인 병사의 입을 빌어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나와 같은 또래로 보이는 독일 병사가 항복의 표시로 손을 들고 참호에서 나왔지요. 그리고는 쏘지 말라고 "친구, 친구" 하고 외치더군요. 그러더니 갑자기 무언가를 꺼내려는 듯이 군복 안으로 손을 집어 넣는 겁니다. 그래서 놀란 나는 개머리판으로 얼굴을 갈려버렸지요. 그런데 나중에 그 친구 손에서 딸려 나온 것은 자기 가족 사진이었어요. 나에게 그걸 보여주려했던거지요 ....전쟁이란게 그런 겁니다."

이 말을 하는 노병의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습니다.

미군 포로를 학살한 독일군의 만행을 고발하고 바로 이어서 그 이후 벌어진 미군에 의한 독일군 포로 학살을 목격자의 증언을 통해 전해주기도 합니다. 이 외에도 울면서 전쟁의 참혹함을 증언하는 노병들도 있었고 전쟁이 끝난 후에도 오랫동안 악몽에 시달린 폭격기 조종사의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그러한 참혹한 전쟁의 이야기를 들려주면서도 전투 중에 먹었던 초컬릿 푸딩을 얹은 로스트 비프의 이야기를 하며 그것이 얼마나 맛있었는지 정열적으로 이야기하는 노병의 모습을 소개하기도 했습니다. 장군들과 전략가들의 지도 위에서는 점과 선으로 표시되겠지만 그 속에는 우리와 같이 뼈와 살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이 다큐먼타리를 보면서 전쟁의 참혹함보다도 더 많은 생각을 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이 다큐먼타리에 사용된 수많은 사진들과 동영상들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이 다큐먼타리의 90% 이상은 전쟁 당시 찍었던 사진들과 동영상 그리고 녹음 자료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나머지는 전쟁을 경험한 사람들의 증언인데 이러한 기록들이 감독의 천재적인 편집을 거쳐 가장 효과적으로 전쟁의 이야기를 전해주는 수단이 되었습니다. 진행자의 나래이션이나 노병들의 증언이 영상과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는데 물론 감독의 탁월한 솜씨가 놀랍기도 하지만 그러한 기록들이 보존되어 있다는 것이 무엇보다도 놀랍고 또 부러웠습니다.

다큐먼타리를 제작하기 위해 켄번즈와 제작진들은 수많은 참전 용사들을 만나 그들의 증언을 녹음하고 현재 그들의 모습을 촬영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자료들은 단지 다큐먼타리를 위한 원자료로서만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미국 의회도서관에 영구 보존 된다고 합니다. 아닌게 아니라 이러한 참전용사들의 증언을 기록하는 작업은 현재에도 계속되고 있고 다큐먼타리가 시작되기 전에 켄번즈가 직접 나와 그 작업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Veterans History Project(VHP)라고 불리는 이 작업은 미국 의회 도서관을 중심으로 여러 기관들이 공동으로 진행하고 있는 작업인데 이곳을 통해 한국전쟁을 비롯하여 제 1차 세계 대전에서부터 최근 이라크 전쟁에 이르기까지 미국이 참전한 전쟁에 대한 다양한 증언들을 모으고 있습니다. 미국 사람들이 보여주는 기록 보존을 위한 노력은 전에도 말씀드린적이 있으니 다시 언급하지는 않겠습니다만 이러한 다큐먼타리 작업을 통해 새로운 기록을 찾고 또 그것을 다른 사람들이 이용할 수 있도록 제공하는 이 사람들의 모습이 부러웠습니다.
저는 이러한 모습을 보면서 우리의 역사와 현실을 잠시 생각했습니다. 다른 많은 분들처럼 저도 전쟁을 싫어합니다. 그래서 전쟁의 이야기를 듣는 것조차도 마음이 편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우리는 전쟁의 이야기들을 기록하고 보존하여야 합니다. 그래서 다시는 그러한 처참한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도록 교훈으로 삼아야하는 것이지요. 그렇게 본다면 우리에게도 기록하고 보존해야 할 많은 전쟁의 기억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전쟁의 기억 뿐만 아니라 우리가 경험한 20세기의 역사를 제대로 기록하고 보존해야  의무가 우리에게는 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는 그동안 이러한 중요한 기록들을 제대로 보존하지 못했습니다. 정부에서 뒤늦게나마 공공기록물관리에 관한 법률을 만들어 체계적으로 기록물을 관리하기 시작한 것이 불과 얼마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전국적인 단위에서 이 제도가 제대로 시행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 제도에 따라 보존되는 것은 정부에서 생산하는 공식적인 기록이지 현재 사라져가고 있는 20세기 우리의 일상은 아닙니다.

지난 20세기에 우리 한국은 너무나 큰 변화를 겪어왔고 발전과 근대화라는 이름 아래 우리의 전통과 과거의 기억들은 한 동안 설자리를 잃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비록 역사에 대한 관심이 최근에 들어 많이 생기고 각 종 미디어에서는 우리 역사에 대해 많은 공간을 할애합니다만 정작 역사를 아끼고 지킨다는 말을 할 때 우리는 몇 백년 전 혹은 몇 천 년전의 과거만을 생각하지, 몇 십년 전의 과거는 생각하지 않는 듯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은 과거로 갈수록 더 심한 것 같습니다.

우리 민족의 상고사에 대해 열띤 토론이 벌어지고 사람들의 관심도 집중되어 있는데 비해 고려나 조선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관심이 적습니다. 그리고 일제 시대에 대해서는 그나마  관심이 있지만 그 이후의  우리의 현대사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현대사에 대해 관심이 적다는 말은 현대사를 이야기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그 현대사를 기록하고 보존하는데 관심이 적다는 의미로 드리는 말씀입니다.)

이러한 현상이 나타나는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우리가 일반적으로 '역사'라고 말할 때 우리는 그것을 최소한 몇백년 이전의 과거 즉, 당시를 살았던 사람들이 모두 세상을 떠난 시기의 이야기만을 역사라고 생각하고 있지 않는지 물어보고 싶습니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현재에 가까운 과거의 역사, 그 역사의 경험자들이 살아있는 시기의 역사는 역사가 아니라 현재로 취급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간과하고 있는 것은 비록 아직까지는 그 경험자들이 살아있기 때문에 현재라고 여길지도 모르겠지만 그들이 죽고 나면 그 시기 역시 역사가 될 것이고 지금부터라도 제대로 그들의 기억을 보존하지 않으면 우리의 20세기는 우리 역사에서 사라져 버릴지도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현재 분명한 것은 일제 시대와 6.25 라는 20세기 한국 역사의 큰 사건들을 경험한 이들이 빠르게 사라져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신문이나 기타 기록물들이 있기 때문에 20세기는 조선 시대나 고려 시대에 비해서는 더 많은 기록을 후대에 남길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사회의 표면에서 이루어지는 큰 이야기들 뿐이고 그들이 가진 한계 때문에 전체 사회의 모습을 보는데는 제약이 있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하루하루를 어떻게 살았는지 그리고 그들이 보는 사회와 역사적인 사건은 어떠했는지 그것을 신문이나 공식 기록을 통해 전부 알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이라도 당장 우리는 그러한 보통 사람들의 기억을 기록하고 보존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문서로  남은 기록들이 미처 기록하지 못한 우리 사회의 모습들을 찾아 기록하고 보존해야 합니다.

언젠가 말씀드렸지만 블로거들이 남기는 현재의 기억들도 나중에는 중요한 사료가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 경험자들이 빠르게 나이가 들어가고 세상을 떠나고 있는
20세기의 최근 기억들을 어떻게 기록하고 보존할 수 있을까요? 분명 현재 우리에게는 그러한 기억들을 기록하고 보존할 수 있는 기술과 자원이 있습니다. 그에 관한 이야기를 다음 글에서 이어보겠습니다.

* 이 글에서 사용된 이미지는 켄번즈의 The War 웹페이지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by Clio | 2007/10/03 05:34 | 역사이야기 | 트랙백(1) | 핑백(3) | 덧글(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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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ed from 愚公移山 at 2007/10/03 09:54

제목 : 공공기록과 역사 1
기록과 역사 ...안타깝게도 우리는 그동안 이러한 중요한 기록들을 제대로 보존하지 못했습니다. 정부에서 뒤늦게나마 공공기록물관리에 관한 법률을 만들어 체계적으로 기록물을 관리하기 시작한 것이 불과 얼마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전국적인 단위에서 이 제도가 제대로 시행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 제도에 따라 보존되는 것은 정부에서 생산하는 공식적인 기록이지 현재 사라져가고 있는 20세기 우리의 일상은 아닙니다. ......more

Linked at mirupsec님의 글 - [.. at 2007/10/03 13:31

... 0 metoo 나중에 그 친구 손에서 딸려 나온 것은 자기 가족 사진이었어요 오후 1시 31분 ... more

Linked at Cliomedia : 구술사.. at 2007/10/06 06:30

... 앞의 글에서 사라져가는 보통 사람들의 기억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그리고 우리에게는 그러한 사라져가는 20세기의 기억을 기록하고 보존할 방법과 수단이 있다고도 말씀드렸지요. 문서로 ... more

Linked at Cliomedia : 구술사.. at 2007/10/13 05:52

... 도 문학 작품이나 연극 혹은 영화 같은 예술 작품을 위한 원자료가 될 수도 있고 그것들을 위한중요한 모티브를 제공하기도 합니다. 구술사에 관한 이야기를 처음 시작하며 소개해 드렸던 켄번즈와 같은 다큐먼타리 작가들의 손을거치면 훌륭한 역사 다큐먼터리의 일부가 되기도 합니다. 이 외에도 구술사 인터뷰가 활용될 수 있는 영역은 많은데요, 제가 본 것중에서 ... more

Commented by joowon at 2007/10/04 12:06
안녕하세요. 언제나 재밌게 이곳의 글을 읽고 있습니다. 계속 기대 할꼐요.
Commented at 2007/10/05 07:21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Clio at 2007/10/05 12:50
joowon 님 / 재미있게 읽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사실 제가 joowon님 블로그에서 전자 음악에 관한 많은 정보를 얻는 다는 것 모르셨죠. 늘 눈팅만 했는데 갑자기 이렇게 글을 남겨주시니 저도 이제부터는 ... ^^

비공개 M 혹은 K 님^^ / 부러워하시니 저는 부끄럽습니다. 몸 둘바를 모르겠군요. 갑자기 어깨가 무거워집니다. 새 집에도 놀러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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