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과 용서: 시몬 비젠탈

1945년 5월 미육군 11사단 병력이 오스트리아의 린쯔(Linz)시 인근에 있던 마우트하우젠(Mauthausen) 유태인 수용소에 도착했을 때 병사들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참상을 보았습니다.  이 후에 '홀로코스트'라고 불리며 전 세계 사람들을 경악하게 만든 유태인 대학살의 현장을 목격하게 된 것이지요. 당시 현장을 보았던 병사들은 만일 '제네바 협정'이 없었더라면 그런 만행을 저지른 독일군들을 모두 사살해 버렸을 것이라고 할 정도로 분노하고 또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참을 수 없는 악취가 풍기는 수용소 막사에는 아직 살아남은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살아남은 이들 중에는 시몬 비젠탈(Simon Wiesenthal)이라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마우트하우젠 수용소에서 석방되었을 때 비젠탈은 몸무게가 45 킬로까지 줄어서 제대로 서 있기도 힘들 정도였다고 합니다. 육체적으로 허약해 졌을 뿐만 아니라 매일 매일 죽음과 직면해야 하는 수용소 생활을 하며 그의 정신은 자신의 현재 처지를 생각할 수도 없을 만큼 약해져 있었지요. 하지만 미군들에게 포로로 잡힌 독일군 SS의 장교들이 초라한 모습으로 심문당하는 장면을 보면서 그는 무엇인가 달라졌음을 느끼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장면을 보면서 정의가 실현되고 있다는 것을 생각했다고 하는군요. 아울러 대학살로부터 기적처럼 살아남은 자신이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 지를 그 때에 결정했습니다. 그 때 이후로 2005년 9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시몬 비젠탈은 2차 대전 기간 동안 나찌들이 저지른 만행을 기록하고 나찌 전쟁 범죄자들을 추적하는 일에  평생을 바치게 됩니다. 그래서 시몬 비젠탈은 '나찌 사냥꾼(Nazi Hunter)'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는데요, 비젠탈의 일생을 살펴보면 단지 나찌 범죄자들을 추적하는 일을 한 사람으로만 치부하기에는 너무나 감동적인 이야기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비젠탈의 이야기를 해 볼까 합니다.

1909년, 당시까지는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의 동쪽 변방이던 르뵈프(Lvov, 발음에 대해 지적해 주신 deutsch님께 감사드립니다.)에서 유복한 유태인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비록 1차 세계대전 동안 아버지를 여의고 그 후 재혼한 어머니를 따라 양부 밑에서 자랐지만 남부러울것이 없는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유태인이라는 이유로 상급학교 진학에 지장을 받기도 했지만 1930년대 말에는 성공한 건축가로서 부유한 유태인들의 저택을 설계하며 아름다운 아내와 함께 인생의 절정기를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비젠탈의 행복한 인생에 먹구름이 드리운 것은 1939년 독,소 불가침 조약이 맺어지면서부터입니다. 그 조약에 따라 비젠탈이 살던 지역은 소련의 지배 아래 들어갔고 부르주아지로 취급된 비젠탈은 건축가로서의 직업을 잃고 인근의 스프링 공장에서 강제로 일하게 됩니다. 그리고 양아버지와 이복 형제들이 소련군에 의해 체포되고 또 죽어가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하지만 이것은 앞으로 그에게 닥칠 다른 비극에 비하면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불가침 조약에도 불구하고 독일과 소련은 전쟁에 빠져들었고 비젠탈이 살던 지역은 다시 독일의 치하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 과정에서 유태인이던 비젠탈은 독일군들에 의해 수용소에 갇히는 신세가 되지요. 예전에 알던 사람의 도움으로 간신히 죽음은 면했지만 수용소에서 강제 노동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와중에 가족과 친척들이 하나하나 세상을 떠나는모습을 보기도 합니다. 자신의 어머니가 수용소로 가는 기차에 강제로 실리는 장면을 목격하기도 했다고 하는군요. 다행히 비젠탈의 아내는 겉모습이 유태인처럼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신분증을 위조하여 폴란드인으로 행세하며 유태인 수용소에 갇히는 운명을 피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우크라이나 지역의 수용소에 억류되어 있던 비젠탈은 여러 차례 기적적으로 죽음을 피합니다. 비젠탈의 회고록에는 자신을 도와주었던 독일군들의 이야기를 비롯해서 죽음의 문턱에까지 갔다가 살아난 이야기들이 나옵니다. 그리고  마침내 소련군들이 그 지역으로 진격해오자 수용소에 있던 유태인들을 빨리 처형하고 후퇴하려던 독일군들의 손에서도 살아남아 오스트리아로 이동이 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비젠탈이 수용되어 있던 수용소에 근무하던 독일군들은 수용소에 있는 유태인들을 모두 다 처형할 경우 더 이상 감시해야 할 사람이 없어지고 그러면 자신들은 소련과 대치하고 있는 동부 최일선에 배치될 것이라 걱정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일부 유태인들을 살려두고 그들을내륙으로 이동시킨다는 명목으로 자신들은 동부 전선으로 전출되지 않도록 머리를 썼다는군요. 그 결과 오스트리아 쪽으로 이동하면서 줄어든 유태인 숫자를 채우기 위해 폴란드의 한 마을에 사는 사람들을 모두 끌어내어 유태인과  같이 이동시켰다고 합니다. 이런 과정을 거쳐 몇 개의 수용소를 전전하다가 비젠탈이 최후로 도착한 곳이 오스트리아 북부의 마우트하우젠 수용소였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미군들을 맞이 한 것이지요.

미군들에 의해서 수용소에서 풀려난 후 겨우 몸을 추스린 비젠탈은 미군들과 함께 나찌 전범들을 체포하는 일에 나섭니다. 그렇다고 분노에 찬 총구를 독일군들에 들이대는 것이 아니라 침착하게 그리고 매우 체계적으로 이 작업을 해나갑니다. 그는 수용소에서 풀려난 다른 유태인 생존자들을 만나서 그들의 증언을 기록하고 수집하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이용하여 독일군들의 잔혹 행위와 그에 가담한 사람들 그리고 그것을 목격한 증인들은 서로 연결하는 교차 색인 카드를만들기도 했습니다. 비젠탈이 만든 이 색인 카드는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에서 매우 유용하게 씌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전쟁 직후 연합국에서 많은 관심을 가지고 진행하던 나찌 전범에 대한 추적과 재판은 냉전이 시작되면서 거의 중단됩니다. 미국과 소련이라는 두 세력이 대치하는 와중에서 과거에 일어난 일들, 그리고 언제나 소수 민족이었던 유태인들에게 일어난 일에 대해 관심을 가지려 한나라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비젠탈은 미군들과의 관계를 청산하고 혹시 나중에 다시 있을지도 모를 재판에 대비해 스스로 나찌 전쟁 범죄에 대한 자료 수집 센터를 만들고 자원 봉사자들과 함께 그 일을 꾸려나갑니다. 이처럼 자료 수집에 열정을 기울인 이유는 나찌 전범들을 제대로 법에 따라 재판하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믿을 만한 증언과 확실한 물적 증거가 있어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그러한 기록을 남김으로서 후대가 선대의 잘못을 기억하고 다시는 그런 비극을 일으키지 않아야 된다고 믿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자원 봉사자들의 힘만으로 그 일을 꾸려나가기는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1950년대말이 되면서 비젠탈의 자료 센터는 더 이상 유지할 수 없는 상태에 빠지게 되었고 비젠탈은 자신이 수집한 자료들을 모두 이스라엘 정부에 넘긴 후 센터의 문을 닫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에 넘기지 않고 자신이 계속해서 가지고 있었던 문서도 있었는데 그 중 한 가지가 유태인 말살 계획의 입안자이기도 했던 아돌프 아이히만과 관련된 자료였습니다. 그리고 결국 이 자료들로 인해 비젠탈의 이름이 전세계에 알려지게 됩니다.

2차 대전 후 아르헨티나로 피신해 있던 아이히만은 이스라엘 첩보 기관에 의해서 체포되고 예루살렘으로 압송되어 재판을 받은 후 1961년에 사형을 당합니다. 이 체포 과정에서 비젠탈이 수집한 정보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전세계적으로 주목을 끌었던 이 사건과 함께 비젠탈의 이름도 세상에 알려지게 됩니다. 아이러니한 사실은 비젠탈이 처음 자료 센터를 열었던 오스트리아의 린쯔(Linz) 라는 도시는 바로 아이히만이 어린 시절을 보냈던 곳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모든 비극의 주범이라 할 수 있는아돌프 히틀러가 태어난 고향  역시 이곳이었지요. 비젠탈이 살던 집 근처에 히틀러 부모의 무덤이 있었고 또 매일 출근 길에 아이히만이 살았던 집을 지나쳤다고 하는데 그 집을 볼 때마다 불편한 느낌이 들었다고 합니다.

아이히만의 체포와 함께 세계적으로유태인들에게 저질렀던 독일의 만행이 다시 주목을 받으면서 비젠탈은 자료 센터를 다시 엽니다. 이번에는 오스트리아의 수도 비엔나에사무실을 열고 훨씬 더 정열적으로 나찌들의 전쟁 범죄와 관련된 자료들을 수집하고 그들의 행방을 찾는데 힘을 쏟습니다.

이러한 비젠탈의 활동이 다시 한 번 주목을 받은 것은 안네의 일기로 잘 알려진 안네 프랑크의 가족들을 연행한 독일 게쉬타포 장교인 실버바부어를 추적하여 체포하게 한 일이었습니다. 안네의 일기가 전세계에 알려지자 여전히 남아 있던 나찌 추종자들은 그 일기가 조작된 것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이러한 주장을 들은 비젠탈은 결국 안네 프랑크의 가족을 연행했던 실버바우어를 체포하도록 하여 그가 안네 프랑크 가족을 연행했음을 실토하게 만드는 것으로 나찌 추종자들의 망언을 잠재웁니다. 이 외에도 그는 평생 동안 1000명 이상나찌 전범들의 행방을 추적하고 범죄 행위에 대한 증거를 수집하여 법에 따라 이들이 심판을 받게 만들었습니다. 그 중에는 전쟁중에 수많은 어린이들과 여성을 학살한 후 종전과 함께 사라졌다가 미군과 결혼하여 뉴욕 시티에서 거주하고 있던 전직 수용소 여성간수도 있었습니다. 과거를 잊고 새로운 인생을 살고 있던 그녀에게는 충격이었겠지만 결국 그녀도 독일로 송환되어 재판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이 일을 통해 미국에는 나찌들이 없다고 주장하던 미국 정부는 나찌들을 처벌하는 특별법까지 만들게 됩니다.

그렇다고 비젠탈이 경찰처럼 수사를 하고 현장에 나가서 나찌들을 직접 추적하는 일을 했던 것은 아닙니다. 그가 하는 일은 나찌 전범들과 관련된 자료들을 세심하게 수집하고 그러한 자료들을 바탕으로 추리하여 지하에 숨어든 나찌들의 현재 위치를 사법당국에 알리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비젠탈이 단순한 '나찌 사냥꾼'만이 아니었다는 것은 그가 관심을 가진 것이 유태인 피해자들만이 아니었다는 것을 통해 알 수있습니다. 그는 나찌 독일이 학살한 사람들 중에는 유태인 뿐만 아니라 집시와 장애인, 동성연애자들도 있었고 그 외 폴란드를 비롯한 동유럽 사람들과 러시아인들 가운데에서도 무수한 사람들이 학살당했다는 것을 알리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그의 활동은 나중에 유엔에서 반인류적인 전쟁 범죄자들을 처벌하는 법정을 만드는데 많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쉽게 짐작하시겠지만 이러한 활동을 이스라엘도 아닌 유럽에서, 그리고 그것도 여전히 나찌 지지자들이 남아 있는 오스트리아에서 한다는 것은 많은 위험을 무릅쓴 일이었습니다. 협박 편지나 전화 정도는 일상적인 일이었고 심지어 집 앞에서 폭탄이 터진 일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나찌 전력을 의심받던 정치인들 중에는 오히려 비젠탈을 나찌 협력자로 모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 많은 수용소를 거치고도 살아남았다는 것은 비젠탈이 독일군들에게 협조했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었지요. 그리고 복수가 아니라 정의와 진실을 추구하던 그의 태도는 홀로코스트를 빌미로 적극적인 시오니즘을 주장한 다른 유태인들과도 충돌을 일으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힘든 것은 가족들에 대한 위협이었습니다.

전쟁 동안 폴란드인 행세를 하며 살아남았던 아내와 수용소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비젠탈은 전쟁 직후 서로가 이미 죽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90명에 가까운 주위의 친척들 모두가 수용소에서 죽은 가운데에도 이 두 사람은 기적처럼 살아 남았습니다. 그런 두 사람이 다시 만나서 낳은 아이는 얼마나 소중한 아이였을까요? 그런데 비젠탈의 활동을 방해하는 사람들은 이 아이를 두고 협박을 합니다. 그 때 비젠탈은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해 많은 고민을 했다고 합니다. "이제 그만 하면 되지 않았느냐" 며 설득하는 사람들고 많았고 무엇보다 사랑하는 딸이 위험한 상황에서 아버지로서 힘든 고민을 하게 되었지요. 하지만 그러한 위협에도 굴하지 않고 비젠탈을 꾸준히 자신의 일을 해나갑니다. 비젠탈은 만일 이런 작업을 중단하면 사람들은 과거의 비극을 잊게 되고 또 다시 그런 일을 저지를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또 그런 비극이 일어날 때에는 반드시 유태인들만이 피해자가 되리라는 법은 없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아울러 그는 사람들 사이의 증오와 기술의 발달(특히 사람을 살상하는 기술)이 같이 만나면 정말 엄청난 비극이 일어날 수도 있다고도 했습니다.

이와 같은 우여 곡절을 겪으며 비젠탈은 '나찌 사냥꾼'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고 나찌 전범에 대한 정보를 얻거나 자문을 구하는 사람들이 전세계로부터 찾아왔습니다. 한국에도 잘 알려진 영국의 추리 소설 작가 프레데릭 포사이드가 전 나찌 장교를 모델로 한 작품을 준비하며 비젠탈을 찾아간 이야기는 유명합니다. 포사이드는 자신의 작품 속에서 나찌 장교로서 전쟁 후 지하에 숨어들어 제3국으로 탈출을 시도하는 한 가공의 인물을 설정하고 그와 관련된 자료가 있는지 비젠탈에게 물었습니다. 그러자 비젠탈은 자신의 사무실에 가득 찬 서류 상자들을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뭐 새로운 인물을 창조할 필요까지 있겠습니까? 그저 이 상자들 속에서 한 사람 고르세요."  이렇게 해서 탄생한 작품이 바로 '오데사 파일'이라는 소설입니다. 그리고 그 소설은 1974년에 영화로도 만들어졌는데 이 영화 속에는 실제 비젠탈이 출연하기도 했습니다.

비젠탈의 활동에서 제가 특히 주목한 것은 무엇보다도 증인들과  증거 자료에 치중하는 모습이었습니다. 대학살에서 가족을 잃고 간신히 살아남은 생존자로서 자칫 감정적으로 처리할 수도 있는 문제에 대해 비젠탈은 철저하게 객관적으로 그리고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증거를 바탕으로 모든 일을 처리하였습니다. 이러한 비젠탈의 모습은 결국 다른 유태인 조직들과도 마찰을 일으키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쿠르트 발트하임 전 유엔 사무총장과 관련된 사건입니다.

1970년대에 유엔 사무총장을 역임했고 1986년 오스트리아의 대통령에 당선된 발트하임은 당선과 함께 과거의 전력과 관련된 시비가 일어납니다. 발트하임은 2차 대전 중 독일군에 복무했는데, 복무 당시 발칸 반도에서 유태인 학살에 참여했다는 주장이 제기됩니다. 본인은 그 사실을 부인했음에도 불구하고 여러 단체에서는 발트하임이 나찌 전범이기 때문에 재판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고 급기에 미국 정부에서는 그를 '기피 인물'로 지정하기에 이릅니다. 그런데 이 와중에서 비젠탈은 발트하임이 전범이라는 주장에 반대하고 나섭니다. 비젠탈이 보기에 발트하임은 최악으로 보아도 '기회주의자' 정도이지 전범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주장의 결정적인 이유는 그의 전범활동을 확실하게 증명할 수 있는 믿을 만한 증거가 없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세계유태인총회(World JewishCongress)의 대표는 미국 의회의 청문회에 나가서 이렇게 주장합니다. "발트하임이 전범이라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그것을 증명할 수 있는 자료는 워싱턴에 있는 문서 보관소를 찾아 보면 많이 있을 겁니다."  이에 대해 비젠탈은 강하게 반대합니다. 한 사람을 전범으로재판하는 것은 그렇게 먼저 고발하고 나서 증거를 찾는 것이 아니라 모든 증거를 철저하게 수집한 후 해야 할 일이라는 것이지요. 이일로 인해 많은 후원자들을 잃기도 했지만 철저한 증거와 증인을 중시하는 그의 태도는 바뀌지 않았습니다.

나찌 전범을 추적하고 자료를 수집하는 일을 하면서도 비젠탈을 여러 권의 책을 펴냈고 또 활발한 강연활동을 했습니다. 그가 펴낸 여러 권의 책 중에서 국내에 변역된 것으로는 '해바라기'가 유일한데요. 이 책의 전반부에서 비젠탈은 전쟁 중에 경험한 한 가지 사건을 소개하고 독자들에게 중요한 질문을 던지고있습니다. 그리고 책의 후반부에는 비젠탈이 던진 질문에 대해 사회 각계 각층의 인사들이 제시한 대답이 실려 있습니다.

이 책의 전반부에서 비젠탈은 자신이 수용소에 있을 때 만났던 한 독일군 장교의 이야기를 합니다. 어느 날 의무실에 불려간 비젠탈은 부상을 당해 죽어가는 독일군 장교를 만납니다. 죽음을 앞둔 이 독일군 장교는 비젠탈에게 자신이 저지른 유태인 학살을 솔직하게 고백하고 용서를 구합니다. 죄없는 유태인들을 잔인하게 학살하는 죄를 저질렀으니 죽기 전에 유태인으로부터 용서를 받고 싶었던 것이지요. 과연 이 상황에서 비젠탈은 어떤 선택을 했을까요? 그 독일군 장교를 용서해 주었을까요? 이 책에서 비젠탈은 독자들에게 만일 당신이 그런 상황에 처하게 된다면 어떤 결정을 했겠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이 책의 2 부는 그 질문에 대한 대답입니다. 한국어 판을 찾아 보니 홍세화씨를 비롯한 몇 몇 한국 인사들의 글도 실려있더군요. 여러 사람들의 대답을 들으면서 독자들도 많은 생각을 하게만드는 책입니다. 아마 많은 분들이 읽어보셨으리라 생각합니다만 혹시 읽어 보지 않으셨다면 한 번 읽어 보십시오.

비젠탈의 일생을 보면서 저는 우리의 과거를 생각했습니다. 물론 여러 가지 처한 환경은 다르지만 우리에게도 비젠탈이 했던 것처럼 과거의 비극들을 하나하나 기록하고 그 비극을 일으킨 사람들에게 책임을 물을 기회가 있지 않았던가요? 역사를 이야기하며 '만약 그랬덨더라면...'을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러한 후회가 생기는 일들을 제대로 알고 기억하여 그런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은 역사를 공부하는 중요한 목적 중의 하나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비젠탈이 생전에 늘 입버릇처럼 말했던 과거를 기억하는 일은  미래에 있을지도 모를 또다른 비극들을 막기 위해 우리가 반드시 해야할 너무나 중요한 일입니다. 당장 자신의 아버지나 할아버지가 저지른 나쁜 행동들을 이야기하는 것이 불편하고 부끄러운 일일런지는 모르겠지만 그것을 이야기하고 또 기억하지 않으면 그러한 일은 언제라도 또 일어날 수 있고 그 때에는 가해자의 후손인 내가 피해자가 될 수도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생전에 한 인터뷰를 통해 비젠탈의 아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대학살로 죽은 600만명의 유태인들과 결혼했습니다. 우리에게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평생을 전쟁의 기억을 가지고 살아간 비젠탈은 행복했을까요?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 내가 죽으면, 전쟁 중에 죽은 이들을 만나게 되겠지요. 그리고 그들이 '비젠탈. 당신은 어떻게 살았소?' 하고 묻는다면 나는 '먼저 죽은 당신들을 절대 잊지 않고 살아왔다'고 얘기할 겁니다."

그런 비젠탈의 노력 덕분에 우리는 과거의 비극들을 기억하고 그것이 다시 일어나는 것을 막으려 하는 것이겠지요. 그러나 최근에 일어나는 일들을 보면서 인간은 기억할 줄 아는 동물일 뿐만 아니라 그 기억을 잊어 버리기도 하는 동물인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그 기억 중에서 필요한 부분만 선택하여 현재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이용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비젠탈이 말한 '기억'의 목적은 그것이 아니었는데 말입니다. 마지막으로 최근에 제작된 비젠탈의 일생을 다룬 다큐먼타리 "I Have Never Forgotten You" 의 예고편을 소개해 봅니다.  


* 이 글을 위해 참고한 자료와 이미지의 출처입니다.

  1. Levy, A. (1994). The Wiesenthal File. Grand Rapids, Mich: Eerdmans.
  2. Pick, H. (1996). Simon Wiesenthal: A Life in Search of Justice. Boston: Northeastern University Press.
  3. Wiesenthal, S. (1967). The Murderers Among Us; the Simon Wiesenthal Memoirs. New York: McGraw-Hill.
  4. Wiesenthal, S. (1976). The Sunflower. New York: Schocken Books.
  5. Wiesenthal, S. (1990). Justice Not Vengeance: Recollections. Grove/Atlantic.
  6. 시몬 비젠탈, 박중서(역), "해바라기" , 뜨인 돌, 2005
  7. Simon Wiesenthal Center: 비젠탈의 뜻을 이어 만든 이 센터에서는 유태인들 뿐만 아니라 지구 여러 곳에서 박해 받고 소외되는 사람들의 상황을 세계에 알리고 이들에 대한 많은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특히 탈북 주민들과 북한 내의 인권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8. Mauthausen Memorial Web site (English pages) : 마타하우젠 기념관의 웹싸이트입니다. 독일어로 된 웹페이지이지만 화면 아래에 있는 영어 옵션을 클릭하시면 영문 웹페이지도 보실 수 있습니다. 수용소에 관한 기록은 물론 수용되었던 사람들의 증언도 보실 수 있습니다.
  9. Moriah Film: 최근 제작된 비젠탈의 전기를 다룬 다큐멘터리 "I Have Never Forgotten You"의 웹페이지입니다. 예고편뿐만 아니라 다큐먼타리 중의 일부가 소개되어 있습니다. 아이히만을 추적하던 다른 동료가 아이히만의 자식들이 평화롭게 수영하는모습을 보면서 그 아이들을 죽여버리고 싶었다고 고백하는 장면은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그 동료는 그러한 행위에 대해 복수가 아니라 아이히만에 대한 벌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비젠탈은 살인의 책임은 살인자가 지는 것이지 그 자식들이 지는 것이 아니라는 말로 그를 말립니다. 비젠탈이 원한 것은 복수가 아니라 정의였고 진실이었지요. 2007년 베를린 영화제에서 처음 상영되었는데 일반 극장에서는 보실 수 없을 겁니다. 웹페이지에 가시면 작품의 상영일정이 나와 있으니 혹시 미국에 계신 분들이라면 한 번 찾아보십시오. 물론 디비디를 구입하실 수도 있습니다.
  10. Museum of Torelance : 시몬 비젠탈 센터에서 운영하고 있는 '관용의 박물관' 웹싸이트입니다.
  11. Mauthausen - Concentration Camp and Memorial Site - photographs taken in May 2003 : 기념관으로 운영 중인 마우트 하우젠의 최근 사진들을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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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lio | 2007/11/17 03:07 | 역사이야기 | 트랙백 | 덧글(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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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老姜君 at 2007/11/17 05:05
무게있는 주제인데도 불구하고 참 재밌게 쓰십니다. 어쩌다 흘러들어와서 링크하게 되네요.
Commented by 케야르캐쳐 at 2007/11/17 10:58
역사 청산과 관련해 일본도 생각나게 하고... 오늘도 잘 읽고 갑니다! :)
Commented by 섬백 at 2007/11/17 11:01
600만..
Commented by 이녁 at 2007/11/17 11:02
참, 아름다운 삶입니다. 아름다운 삶
Commented by 耿君 at 2007/11/17 16:26
아, 정말 잘 읽었습니다 (훌쩍)
Commented by 잔잔 at 2007/11/17 22:49
"사람들 사이의 증오와 기술의 발달(특히 사람을 살상하는 기술)이 같이 만나면 정말 엄청난 비극이 일어날 수도 있다고도 했습니다." 와 비슷한 말을 한 사람들은 많았지만 비극을 막기위해 행동한 사람은 드물다고봅니다. 전 특히나 이런 행동가적 모습이 감동적이네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
Commented by daewonyoon at 2007/11/18 00:53
독일이름 읽기 / 지몬 , 질버바우어
Commented by 츠첸 at 2007/11/18 20:59
홀로코스트 이야기를 들으면 아무래도 감정이입을 하게 됩니다. clio님의 글을 읽으니, 분하고 후련하고 안타깝네요. 우리나라도 이렇게 철저하게 규명되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합니다. 지금도 떵떵 거리며 살고있는 지독한 사람들을 생각하면 치가 떨려요.
Commented at 2007/11/19 08:28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Clio at 2007/11/19 11:41
老姜君 님 / 링크 감사합니다. 재미있게 읽어 주시니 기쁩니다.

케야르캐쳐 님 / 여러 가지 면에서 우리의 역사과 비교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섬백 님 / 600만이라는 숫자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들도 있지요. 실제 일부 역사가들 중에서도 희생자가 600만명까지는 되지 않을 것이라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설사 600만의 절반인 300만, 아니 십분의 일인 60만이 학살되었다고 하더라도 독일 나찌의 만행이 정당화될 수는 없겠지요. 아울러 유태인들 뿐만 아니라 그 전쟁 때문에 무고하게 희생된 수 많은 사람들을 생각하면 과연 전쟁이라는 행위가 어떤 의미로라도 정당화될 수 있는지 의심이될 때가 있습니다.

이녁님 / 아름다운 삶이지요. 그런데 비젠탈의 마음 속은 어땠을까요? 평생 동안 희생자들을 마음에 두고 살아온 그 사람의 마음은 어떠했는지 물어보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耿君 님 /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해바라기'도 한 번 읽어 보십시오.

잔잔 님 / 감사합니다. 중요한 점을 지적해 주셨네요. 말과 행동을 같이 한다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인데 말입니다. 비젠탈은 자신이 하는 말대로 행동한 몇 안되는 사람 중의 하나가 아닐까 싶습니다.

daewonyoon 님 / 좋은 점 지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늘 외국어를 한글로 표기할 때 겪는 고민이고 또 문제점입니다. 이렇게 잘 아시는 분들이 지적해 주시니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츠첸 님 / 우리의 상황과 2차 대전 후 유럽의 상황을 직접 비교할 수는 없지만 말씀하신대로 우리에게는 제대로 진실이 밝혀지지 않은 부분들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해방 이전 일제 시대 뿐만 아니라 그 이후에도 많은 일들이 제대로 기록되지 않았고 또 제대로 알려지지도 않았지요. 더 늦기 전에 기록만이라도 제대로 남겨놓아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비공개 ㅍ 님 / 동감입니다. 외국과 외국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면서도 제가 늘 마음속으로 바라는 것은 글을 읽으시는 분들이 그 이야기들을 통해서 우리 자신의 모습을 다시 한 번 살펴 보았으면 하는 것입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진실을 알면서도 제대로 그것을 말할 수 없도록 만드는 현실이 안타깝지요. 거기에다가 더 하여 조직적으로 기록을 없애버리는 일도 있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만일 그렇다면 과거의 잘못된 일들을 제대로 알지 못 하는 우리와 우리 후대들은 그 잘못된 일들을 되풀이 할 수도 있지 않을런지 걱정이 됩니다.
Commented at 2007/11/19 18:34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Clio at 2007/11/20 09:06
비공개 ㅍ 님 /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뭐라 말할 수 없을 만큼 참담한 심정입니다. ... 제가 앞으로 무엇을 하며 살아가야 할지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해 주시는군요. 감사드립니다.
Commented by hkmade at 2007/11/20 09:39
와아 지식의 향연.. 즐거워요.
근데 Clio님의 글은 띄엄띄엄 올라오는지라 .. 오늘부로 RSS리더기에 등록해뿌렸습니다. ^^
Commented by Clio at 2007/11/21 01:43
hkmade 님 / 음...좀 더 열심히 글을 올려야 겠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감사합니다. ^^
Commented by marlowe at 2007/11/29 14:12
KBS에서 방영한 [Murderers Among Us: The Simon Wiesenthal Story]가 떠오릅니다.
거기서는 [간디]의 벤 킹즐리가 연기를 맡았죠.
지옥에서 나온 사람이 증오심을 품지않고 살아가기가 쉽지 않은 데, 저 분이야말로 진정한 승리자입니다.
Commented by Clio at 2007/11/30 04:02
marlowe 님 / 위에서 소개해 드린 다큐먼타리에 벤 킹즐리가 나와서 처음 비젠탈을 만났던 이야기를 하는데 정말 감동적이었습니다. 한 손으로 얼굴을 문지르며 짓는 비젠탈의 표정에서 희생된 유태인들의 모든 고통이 표현되는 것처럼 보이더라고 하더군요. 복수를 한다는 것과 정의를 세운다는 것은 분명 다른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Commented by deutsch at 2007/12/24 14:00
Lvov는 르뵈프로 발음합니다. 그리고 현재는 우크라이나 도시로 현지 발음으로 하면 "리비우"라고 하는군요.Lvov는 아마 동유럽쪽 철자를 쓸때 그쪽 동네 특유의 기호가 표시가 안된 표기입니다. 참고하시면 좋겠습니다. http://en.wikipedia.org/wiki/Lvov 참조하시면 될 듯 합니다.
Commented by deutsch at 2007/12/24 14:06
린쯔라... 불편했다고 말은 하지만, 그 사실을 모르고 그곳에 자료센터를 세웠다고 해도, 알은 후에도 이사하지 않은 것은 그 집들을 보며 각오를 늘 새롭게 다지려는 뜻 아니었을까요? 그런 생각이 듭니다.
Commented by Clio at 2007/12/25 04:34
deutsch 님 / 발음에 대한 지적 감사합니다. 늘 어렵군요.^^ 아마 린쯔가 마우트하우젠 수용소에서 가장 가까운 도시였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deutsch 님 께서 말씀하신 그런 이유도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 그리고 프레데릭 포사이드의 오데싸 파일에도 비슷한 사람이 나오죠. 나찌 전범의 가족이 살고 있는 집 근처에서 몇 년 간이나 살펴보다가 문제의 그 사람이 나타나자 마자 신고해서 체포하게 하는 사람이 있더군요. 새해에도 좋은 글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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