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예보 하가다(3)-더비스와 미라, 그후 이야기들
1941년 더비스가 미라에게 베풀었던 선행은 미라가 세상을 떠난 이듬 해인 1999년이 되어서야 정말 미라가 원했던 방법으로  보답을 받게 되는데요. 이제 그 이야기를 해 보겠습니다. <그리고 글 사이 사이에 '사라예보 하가다'에 실려 있는 그림들을 소개해 봅니다. 성서 중에서 특히 구약의 이야기들을 읽어 보신 분들은 그림 속에서 진행되고 있는 이야기들을 알아차리실 수 있을 겁니다.>
2차 대전 직 후 감옥에 갇혔던 더비스는 6년의 수감 생활을 마치고 출옥하여 예전의 직장에 복귀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나서 뒤늦게 서벳과 더비스 사이에는 딸이 태어납니다. 라미자(Lamija)라는 이름의 이 딸은 자라나서 경제학을 전공하였고 알바니아 출신의 남편을 만나 1999년 무렵에는 코소보에 살고 있었습니다. 라미자는 아버지가 2차 대전 동안 한 일에 대해서는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 미라가 아버지의 선행을 알리면서 이스라엘 정부에서 준 감사장을 보고 나서야 아버지가 한 일을 자세히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일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이스라엘 정부에서 준 감사장을 복사해서 늘 가지고 다녔다고 합니다.
다들 잘 아시겠지지만 1999년의 코소보는 또다른 전쟁의 참화를 입은 곳입니다. 세르비아 군대에 의해서 알바니아계 주민들에 대한 이른바 '인종 청소'가 자행되었던 곳이지요. 코소보에 살고 있던 라미자의 가족들도 이러한 비극을 피해갈 수 없었습니다. 라미자의 남편이 알바니아 출신이었기 때문에 이들은 자신들이 살던 집에서 쫓겨나와 수용소에 갇히는 신세가 됩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은 라미자의 자식들은 미리 친척들이 있던 헝가리로 탈출시킬 수 있었고 마침 자신들을 방문했던 어머니 서벳을 코소보를 떠나는 마지막 버스 편에 사라예보로 보낼 수 있었던 것이지요.
결국 라미자와 남편  두 사람은 열악한 환경의 수용소에서 탈출하여 천신만고 끝에 인근의 마케도니아에 들어오는데 성공합니다. 그러나 그곳에서 발이 묶여버렸습니다. 흩어진 가족들을 만날 수도 없었고 사라예보에 있던 어머니 서벳과 파리에 거주하던 오빠가 아무리 노력을 해도 이들을 마케도니아 밖으로 꺼내 올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파리에 있던 오빠가 마케도니아에 있는 유태인 단체를 찾아가 보라고 권합니다. 마침 아버지에게 발행되었된 이스라엘 정부의 감사장을 여전히가지고 있던 터라 라미자는 그것을 가지고 그 지역의 유태인 단체를 찾아갔습니다.
2차 대전 동안 유태인들을 도와 준 의인의 자녀가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본 마케도니아의 유태인 단체에서는 이것이 바로 은혜를 갚을 기회라고 생각하고 적극적으로 이스라엘 정부와 접촉을 합니다. 그리고 나흘 만에 이들 부부는 이스라엘로 가는 비행기에 오르게 되었고 헝가리로 탈출했던 자식들과도 이스라엘에서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의 공항에는 이제 노인이 된 미라의 아들이 이들을 기다리고 있었지요. 은인의 가족을 죽음의 위기에서 구해내는 것이 아마 미라가 바란 가장 큰 보답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1941년부터 시작된 긴 이야기는 이렇게 끝이 나는데요. 여기서 한 가지 우리가 잠시 생각해 볼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라에보 하가다'를 지켜낸 더비스나 케말이 유태인이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이들 두 사람은 모두 이슬람 교도들이었습니다. 특히 더비스는 아주 종교적인 집안에서 자라났고 스스로도 이슬람교 신학에 정통한 사람이었습니다. 터키와 파리에서 이슬람 교리를 공부하고 이슬람 율법을 가르치기도 한 사람이었지요. 그런 사람이 자신의 목숨을 걸고 유태인들의 책을 지키고 위기에 처한 유태인의 목숨을 구한 것입니다.

이 글의 처음에 소개한 제랄딘 브룩스의 소설 제목은 '책의 사람(People of the Book)'입니다. 그런데 이 말은 알 알키탑(Ahl al- Kitâb),이라는 아랍어를 번역한 말이기도 한데요, 이 말은 "신성한 책을 따르는 사람들(Followers of the Holy Books)"이라는 의미라고 합니다. 이슬람교의 교리에 따르면 최후의 예언자인 마호메트가 세상에 오기 이 전에도 아브라함이나 이사야 같은 많은 예언자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들을 통해 신의 말씀을 접한 유태인들이나 기독교인들도 결국 이슬람교와 같은 신의 말씀을 따르는 사람들이라 보고 이들을 "신성한 책을 따르는 사람들(Followers of the Holy Books)"이라고 불렀던 것이지요. 그리고 이슬람교 율법에 따라 통치되는 국가에서도 이들 "신성한 책을 따르는 사람들(Followers of the Holy Books)"의 믿음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의 관용을 베풀었다고 합니다. 물론 이슬람교도들과는 차별을 했지만 이들 기독교도와 유태인들 역시 자신들의 종교 행사를 가질 수 있도록 허락한 것이지요.
 
이것이 언제나 지켜진 것은 아니었지만 분명 어느 정도의 관용은 존재했던 것 같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이슬람교도들과 기독교도 그리고 유태인들이 어울려 살던 14세기의 스페인에서 유태인들의 기도서인 '사라예보 하가다'가 만들어질 수 있었겠지요. 그러나 스페인에서 이슬람 세력을 물리치고 강력한 기독교 국가를 세운 이사벨라 여왕은 1492년에 유태인들을 스페인에서 추방하는 명령을 내립니다.   그 때 추방된 유태인들은 유럽 각지를 떠돌다가 일부는 유고슬라비아 지역에까지 이르게 되지요. 하지만 여러 종교의 다양한 인종들이 큰 충돌 없이 지내던 1990년대 이전까지의 유고슬라비아는 '사라예보 하가다'가 보존되기에는 최적의 장소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더비스와 같은 독실한 이슬람 교도가  목숨을 걸어가며 그 책을 지킬 수 있었겠지요.

그렇게 본다면 '사라예보 하가다'는 지난 수 백년간 인간들이 저지른 수 많은 어리석은 증오를 모두 목격한 증인일런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말 없이 관용과 이해의 중요성을 이야기하고 있는지도 모르겠군요. 여기서 이제 마지막으로 제가 최근에 경험한 일과 이 책을 간단히 연결시키며 긴 글을 마치겠습니다.^^

두어 달 전에 우연한 기회로 이스라엘 출신의 야스민 레비(Yasmin Levi) 라는 가수에 대해 알게 되었습니다. 스페인의 플라멩고와 아랍의 전통 음악이 섞인 듯한 아주 특이한 음악을 들려주던 가수였는데 그녀가 부르는 노래의 가사는 분명 아랍어는 아니었고 스페인어에 가까운 것 같기도 하면서 스페인어는 아닌 듯한 그런 묘한 언어였습니다. 그래서 그녀에 대해 좀 더 찾아 보다가 그녀가 부르는 노래의 노랫말은 라디노(Ladino)라는 언어이고 그것은 현재 지구상에서 사라져가고 있는 언어 중의 하나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언어를 사용하던 사람들이 바로 스페인에서 '사라예보 하가다'를 만든 유태인들이라는 것도 알게되었지요.

15세기 말에 스페인에서 추방된 유태인들은 이탈리아와 그리스 그리고 발칸 반도와 터키에까지 퍼져서 살았는데 이들을 가리켜 '셰파디 유태인(Sephardi Jews)' 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이들이 사용하던 언어인 라디노는 고대 히브리어와 라틴어, 그리이스어, 그리고 프랑스어 등이 다양하에 섞인 언어라고 합니다. 아래에 야스민 레비의 노래 중 한 곡을 올려 봅니다."Nani Nani" 라는 제목의 이 노래의 영어 번역을 보니 아마 자장가 인 듯 합니다.

몇 주전 집으로 돌아가는 차에서 이 노래를 듣다가 잠에 빠지지는 않았지만 완전히 모든 것을 잊고 노래에 빠져들었던 아주 '위험한' 경험을 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나서 "mesmerize" 라는 영어 단어가 떠올랐습니다. 죄송합니다, 영어를 써서... 그런데 그 당시로는 달리 표현할 말을 못 찾겠더군요.  이거 .... 책에 대한 이야기가 결국 음악에 대한 이야기로 끝을 맺는군요. 긴 글 읽느라 수고하셨습니다. ^^

* 이 글을 위해 참고한 자료와 이미지의 출처입니다.
by Clio | 2008/01/25 13:13 | 책소개 | 트랙백 | 핑백(1) | 덧글(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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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서를 구했다고 하는 군요. 그리고나서 미라는 1998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하지만 미라와 더비스의 인연은 여기서 끝이 나지 않았습니다. 이런... 글이 너무 길어지는 군요. 다음 편에서 계속해야 겠습니다. ... more

Commented by 보리차 at 2008/01/25 13:40
잘 읽었습니다. 예전에 쓰신 사라예보의 전화에 희생된 한 쌍의 연인 이야기도 감명깊게 읽었는데 이번 글도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예전의 그 이야기도, 이번의 더비스의 이야기도, 쉰들러의 이야기도 이데올로기가 폭력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해주는 것 같아 가슴에 와닿습니다.
Commented by 궁극사악 at 2008/01/25 13:55
;결국 미라와 남편 두 사람은 열악한 환경의 수용소에서 탈출하여 천신만고 끝에 인근의 마케도니아에 들어오는데 성공합니다.' 미라 > 라미자 로 바꿔야 할듯 합니다.

가슴에 와닿는 좋은 이야기, 감사합니다.
Commented by 칼리 at 2008/01/25 14:26
레비의 음악을 듣고 트랜스 되는줄알았습니다. 항상 책과 사람이야기 잘보고있습니다. 감사합니다.
Commented by 빛의제일 at 2008/01/25 14:41
한 편의 다큐멘터리를 보듯, 참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
예전에 소개하신 이라크 사서분 이야기, 초등 2학년 아이들에게 어렵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아이들이 재미있게 책 읽었습니다.
고학년을 담임하게 되면 이 포스트 이야기를 아이들에게 하고 싶습니다.
Commented by 오잉 at 2008/01/25 15:03
이미 다음편이 있었군요. 윗 분의 말씀처럼, 다큐멘터리를 만들더라도 흥미있을 것 같은 이야기입니다. 항상 별 말씀 안드리고 보고 있었지만, 정말 너무 보석같은 글들이에요~
Commented by Clio at 2008/01/25 15:50
보리차 님 / 재미있게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폭력에 대한 저항과 함께 서로 다른 점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줄 아는 그런 관용과 이해도 필요한 세상인 듯 합니다.

궁극사악 님 / 틀린 점을 이렇게 찾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루에 세 편을 포스팅하다보니 제가 좀 헷갈렸나 봅니다. 더구나 입에 익지 않은 이름이다보니..

칼리 님 / 늘 읽어 주셔서 오히려 제가 감사드립니다. 정말 걷잡을 수 없이 빨려드는 음악이었습니다.Youtube 에 찾아 보시면 몇 곡이 더 올라와 있답니다. ^^

빛의제일 님 / 그러셨군요. 아이들이 재미있게 읽었다니 저도 참 기쁩니다. 아무래도 이 이야기는 조금 더 생각이 깊어진 아이들에게 맞겠지요. .. 정말 우리 아이들이 다른 것이 틀린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다른 점을 있는 그대로 다르게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그런 마음을 가지고 어른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오잉 님 /그렇게 말씀하시니 이거 부끄럽습니다.^^ 늘 읽어 주시고 좋은 말씀 남겨주셔서 감사드립니다.
Commented by bobo at 2008/01/25 17:30
좋은 이야기 잘 읽었습니다. 링크 추가 해 갑니다~
Commented by oldtype at 2008/01/25 17:33
몇십년이라는 세월을 통해 이렇게 두 집안 (세대가 바뀌니 두 사람이라고 하면 안되겠죠?) 의 인연이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이 놀랍습니다. 더구나 서로 어떤 이해관계도 없었는데 말이에요. 역사와 문화의 유산을 사랑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이렇게 행동할 수 있다니 믿어지지 않을 정도네요. 가슴이 뭉클해져서 잠시 말을 잃었습니다. 언제나 좋은 글 감사합니다 ^^
Commented by Ginger at 2008/01/25 23:59
흥미롭게 잘 읽었습니다. 대단한 이야기네요. 감동받았습니다.
Commented by VIERE at 2008/01/26 10:14
Clio님 블로그는 늘 느끼는 것이지만 보물창고입니다. 저한테는 뭐 더 이상의 표현이 어렵네요.
Commented by turtle at 2008/01/27 17:51
정말 잘 읽었습니다. 평소 올려 주시는 글들 모두 감사한 마음으로 즐겁게 읽고 있었지만 이번에 올려 주신 '책의 사람들' 이야기는 특히 마음에 남네요.
Commented by Clio at 2008/01/29 03:10
bobo 님 / 읽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링크도 감사합니다.

oldtype 님 / 역사와 문화의 유산을 사랑하고 또 두 집안 사이에 존재하는 문화와 종교의 차이를 인정하면서 인간적으로 소통한다는 점에서 더욱 의미가 있는 이야기 인것 같지요.

Ginger 님 / 재미있게 읽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영화로 만들어져도 재미있을 것 같지요?

VIERE 님 / 과분하신 말씀에 몸 둘바를 모르겠습니다. 필요하신대로 이용하십시오 아무리 퍼가도 비워지지 않는 창고입니다. ^^

turtle 님 / 즐겁게 읽는다는 그 말씀에 저도 흥이 납니다. 자주 찾아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Commented by dcafe at 2008/01/29 03:41
일단 도메인 포워딩이 끝나서 예전 주소인 dcafe.org로 접속하시면 됩니다. 그나저나 500여개의 게시물을 수동으로 재등록할 거 생각하니 아득하네요 -_-;;;
Commented by Clio at 2008/01/29 12:12
dcafe 님 / 완전히 단순노동이겠는데요. 'manage' 항목에 가니 importing 기능이 있던데 혹시 사용하실 수 있는지 한 번 보십시오.
Commented by 총천연색 at 2008/01/30 18:04
사라져가는 언어 '라디노'라...
'한글'이 그런 상황이 되지 않을거라 믿습니다.

사연 많은 사라예보란 도시.
거기에 사연 많은 책 한 권.
잘 엿보았습니다.

덕분에 영단어도 하나 외웠네요. 하하.
mesmerize라...
Commented by Clio at 2008/02/01 08:00
총천연색 님 / 한글이 그런 상황에 빠져서는 안되지요. 사라예보에는 아직 가보지 않았지만 기회가 된다면 꼭 한 번 방문해 보고 싶은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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