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때문에 행복한 날
저는 도서관에서 사서로 일하고 있습니다. 하루 종일 도서관에서 문자 그대로 책과  씨름하는 사람이 책 때문에 행복하다니 이상하게 생각하실런지 모르겠습니다. 그것이 아니라면,  책 때문에 직업을 얻었고 또 월급을 받으니 '당연히 책 때문에 행복해야지' 라고 생각하실 분도 계실거구요. 그런데 지난 주에 정말 책 때문에 행복해진 일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직까지 행복하고 즐겁습니다. 바로 그것은 지난 주에 블로그를 통해 알게 된 한 분으로부터 최근에 출판된 한국 책을 몇 권 소포로 받았기 때문입니다.

실제 책이 도착한 것은 2 주전 금요일이었는데 마침 그 날 제가 하루 월차를 내서 쉬었지요. 그래서 그 날 저 대신 소포를 받았던 동료는 그것이 한국에서 온 소포임을 보고 귀한 것이라 생각을 하여 아무나 손댈 수 있는 공개된 우편함에 두기보다는 나중에 저에게 직겁 전해 줄 요량으로 자기 사무실 깊숙한 곳에 넣어 두었답니다. 그러다가 이 친구가 그 다음 주에 개인적인 사정으로 며칠 결근을 하게 되어 도착한 지 1주일이 지나서야 저에게 책을 전해 주더군요. 한국 책을 받아 본다는 기쁨에 일주일이나 그것을 사무실에서 묵혀 둔 친구에게 원망도 못 했습니다.

제가 받은 책은 문학 동네에서 펴낸 신 경숙님의 '리진" 과 황 석영 님의 "심청, 연꽃의 길" 그리고 신예 작가인 김 진규님의 '달을 먹다',이 세 권이었습니다. 앞의 두 권은 제가 부탁을 했고 마지막 한 권은 보내주신 분께서 저의 취향에 맞을 것이라 생각하고 보내주셨는데 정확하게 제 취향을 꿰뚫어 보셨더군요. 최근에 출판된 한국 책을 이렇게 보는 것은 5-6년 만입니다. 몇 년 전 김 훈 님의 "칼의 노래"를 상호대차를 통해 빌려본 이래 처음이더군요. 설레는 마음으로 소포를 풀고 그 안에 있는 책을 만져보는데 얼마나 행복하던지요. 책 때문에 이렇게 행복하다고 느낀 것은 정말 오래 간만이었습니다.
책을 손에 들고 살펴보니 책들이 참 잘 만들어졌더군요. '리진'과 '심청'은 작은 사륙판 크기의 양장본으로 더스트 재킷이 참 고급스러우면서도 부담이 없게 만들어졌더군요.  그리고 책갈피 끈도 책의 내용과 어울리는 색깔인것 같아 더욱 흥미로웠습니다. '리진'의 책갈피 끈은 진한 분홍색이던군요. 화려한 궁중의 무희와 어울리는 색깔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그러고보니 최근 미국에서 출판되는  책들 가운데서 이렇게 책갈피 끈이 있는 책을 본 기억이 잘 나지 않습니다. 한국에서 책을 가장 많이 구입하는 계층이 20대 여성이라는 기사를 어디에선가 읽었는데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웬만한 핸드백에도 들어갈 것 같은 크기에서부터 이 책들은 20대 여성들이 좋아할 만한 요소를 여러 가지 가지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의도한 것은 아니었는데 제가 받은 세 권의 책들을 보니 보니 모두 여성들을 중심으로 끌어가는 이야기라는 점 그리고 역사물이라는 공통점이 있더군요. 시기적으로는 달을 먹다 - 심청 -리진의 순서로 이어지는 것 같은데 일단 리진으로 부터 읽기 시작했습니다. 오랫 만에 읽는 한국책이라 아까워서 최대한 천천히 읽으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아이스크림을 두 손으로 받쳐 들고 혀로 조금씩 핥아 먹는 아이의 심정으로 글자 하나 하나 문장 한 구절 한 구절의 의미를 새기며 읽고 있습니다. 그리고 '리진'에서 보이는 신경숙님의 섬세한 묘사는 그렇게 읽어야 제 맛이 날 것 같습니다.

그런데 '리진'을 읽기 시작한 지금 제가 느끼는 감정은 맛있는 짜장면을 먹으러 식당에 들어갔는데 아주 제대로 만든 스파게티를 먹고 있는 기분입니다. 물론 맛은 있습니다만 제가 느끼는 불만(아마도 욕심?)은 스파게티의 맛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제가 기대한 짜장면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제가 남자라서일까요? 19세기 말 파리에 간 조선의 여인이 보고 생각하고 느낀 일들 속에서 저는 스케일이 큰 역사 이야기를 기대했었나 봅니다. 신경숙님의 이야기는 제가 기대한 것과는 달랐지만 그래도 만족스럽게 읽고 있습니다. 아마 황석영님의 글에서 제가 생각하던 역사 이야기를 발견할런지 모르겠습니다.

사실 유학이랍시고 미국에 오면서 그리고 역사를 전공하는 사람으로서 과거의 한국 유학생들, 20세기 초반 혹은 19세기 후반에 해외에 나왔던 조선의 젊은이들은 서구의 문물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하는 궁금증을 늘 가지고 있었습니다. 한국에 있을 때 저를 가르치신 한 분의 선생님으로부터 유길준의 '서유견문'을 추천받고 많은 생각을 하며 읽어 본 기억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외에도 몇 몇 초기 유학생들의 이야기를 접하면서 그들의 모습에 대해 여러 가지 생각을 할 수 있었는데요.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리진'이라는 소설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지요. 아직 완전히 다 읽지 않아서 어떻다고 말은 못 하겠지만 책의 내용과 별개로 혼자서 여러 가지 상상을 하며 읽고 있습니다. 이 책들을 읽으며 한동안 즐겁고 행복할 것 같습니다. 

* 이 글에 쓰인 이미지는  문학 동네의 홈페이지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 혹시 20세기 초기 미국에 건너와서 공부한 한국 유학생들의 생활에 대해 궁금하신 분들에게는 강용흘 님의 자전적인 소설인 "동양선비 서양에 가시다."를 권합니다. 원래 영어로 출판된 책을 한국어로 번역을 했더군요. 영어 제목은
  Kang, Younghill. East Goes West. (New York: C. Scribner's Sons, 1937). 입니다. 그리고 강용흘님의 행적에 대해서는 2004년 신동아의 논픽션 공모에 우수상을 받은 김지현 님의 글을 읽어보십시오. 여러 가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 줍니다.

이 글과 관련있는 글을 자동검색한 결과입니다 [?]

by Clio | 2008/04/15 03:24 | 세상이야기 | 트랙백 | 덧글(18)
트랙백 주소 : http://cliomedia.egloos.com/tb/1844602
☞ 내 이글루에 이 글과 관련된 글 쓰기 (트랙백 보내기) [도움말]
Commented by 리느시아 at 2008/04/15 04:52
저도 공부하겠다고 물건너온 한 사람으로서 정말 맛있어 보이는 책들입니다. 이번겨울에 한국엘 잠시 다녀올것같은데 저 책들 메모해뒀다가 꼭 읽어봐야겠습니다.
추천해주신 Kang, Younghill. East Goes West. 이 책은 반즈앤노블같은곳에서도 쉽게 구할수 있나요?
요새 교과서만 들여다보니 지루해진 일상에 활력소가 될듯한 책들인것 같습니다.^^
Commented by Smila at 2008/04/15 05:08
정말 오랜만에 한국책을 구하면 얼마나 기쁘고 떨리기까지 하는지...Clio님 기분에 마구마구 공감이 갑니다. 그래도 요샌 인터넷 서점도 있고 또 조금 운전해 나가면 한국서점도 있어서 예전만큼 귀한걸 얻은 듯한 기쁨도 덜하고 덜 아껴 읽게 되지만, 여전히 한국책은 눈에 착착 들어오는 맛이 있어 꽤나 행복해지지요. 저도 작년 한국 방문때 '리진' 을 사오고 아직 못 읽었는데 조만간 읽어봐야겠어요. 황석영씨의 '바리데기' 도 여자 이야기였는데, 이번에도 그렇네요. :)
Commented by 케야르캐쳐 at 2008/04/15 09:38
아껴읽는 그 기분. ㅋ- 좋죠. 전 요즘 반납기일 때문에 책들을 약간 쫓기는 듯 읽는 것 같은 기분도 드네요.
아- 부럽습니다.^^
Commented by julia at 2008/04/15 12:09
예전에 제 동생이 '리진' 에 빠져서는 너무 재미있다고 저한테도 꼭 읽어보라고 막 아우성 치던 일이 생각나네요ㅋㅋ (그런데도 아직 못 읽어봤다는;;)
Clio 님 포스팅 보니 이제 진짜로 읽어봐야할 것 같습니다^^;;
Commented by marlowe at 2008/04/15 13:12
외국에서 살 때는 한국의 모든 것들이 귀중하게 느껴지는 데, 그 중에서도 책이 특히 그렇더군요.
만화가 정구미씨의 어머님께서 일본으로 시집 와서, 매월 모 여성지를 사서 읽는 게 큰 낙이였다는 얘기가 절절하게 느껴집니다.
Commented at 2008/04/15 14:06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アネゴ at 2008/04/15 15:26
밸리에서 와서 글 잘 읽고 갑니다. 저도 책으로 월급을 받고, 책에 쌓여 사는 사람이지만, Clio 님의 일상 왠지 너무 행복할 것 같네요.
Commented by 사은 at 2008/04/15 20:11
오랜만에 한글로 된 책을, 종이에 한글이 인쇄된 것을 읽을 때의 그 기쁨...! 갈수록 한글책 읽는 속도가 느려지고 있는 것은 천천히 조심스레 읽게 되기 때문이라는 변명까지 만들어버리고 말았습니다. :) 클리오님의 기쁨이 가득 느껴져서 저도 덩달아 기뻐지네요. :)
Commented by 아우라ny at 2008/04/15 23:35
저두 전에는 그렇게 인편에 부탁해서 드물게 한국책을 보다가 인터넷으로 오더해서 직접 책을 고를 수 있게 되고,
뉴욕에선 서점에 직접가서 고를 수도 있었고...
그런 걸 생각하니까 소포로 책을 받았던 행복한 기억들이 새록새록 떠오르네요...^^
Commented by kristine at 2008/04/16 07:26
클리오님 제가 정말 직업을 다시 고르라면.... 정말로 대학도서관 사서나 고서적판매 가게 주인 다시말해서 antique book seller 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할때가 많아요. 저는 아버지가 책을 필요하면 보내주시는 편이에요. 책 보시면서 과자도 몇개..... 때때로 재미난 것이 영문으로 해석되지 않은 책이 ( 독일이나 프랑스 작가한해) 한국에는 번역되는 것이 있더라고요. 굳이 서울에서 온 책이 아니더라도 미국에서 아마존으로 오는책이나 또는 대서양건너서 오는 영국에서 오는 책들도 아주 반갑지요.
Commented by 은혈의륜 at 2008/04/16 07:50
저도 한국책좀 보내달라고 전화하면 항상 여름방학에 와서 사 읽으라고 하시더군요... 그래서 여름방학마다 한풀이하듯이 한 30만원어치 지르고 다 읽습니다....

여기에 일부러 철학책같은 오래걸리는걸 들고왔더니 올해는 좀 났군요.
Commented by Clio at 2008/04/16 09:38
리느시아 님 / 강용흘 님의 작품은 현재 절판이 된 것으로 압니다. 하지만 abebooks.com 같은 인터넷 헌 책방을 검색해 보시면 197년 경에 나온 페이퍼 백에서부터 1937년에 나온 초판까지 여전히 팔리고 있습니다. 이왕이면 초판을 한 번 구해 보시지요. 서점에 따라 10 달러 대에서부터 거의 100 달러에 가까운 가격으로 파는 곳도 있더군요.

Smila 님 / 정말 말씀하신대로 '눈에 착착 들어오는' 것 같더군요. 그렇다보니 너무 빨리 진도가 나가서 걱정입니다. 아껴서 두고두고 읽어야 할 텐데 말입니다.

케야르캐쳐 님 / 쫓기는 기분으로 읽으면 그거 참 불편하지요. 책 읽기의 장점 중의 하나가 자신에게 편한 속도대로 가다서다 하며 읽는 것인데 말입니다.

julia 님 / 후회하시지는 않을 겁니다. 특이한 소재이기도 하지만 또 신경숙님의 문체가 또 매력이 있더군요. 한 편의 영화로도 만들어질 법한 이야기인 것 같았습니다.

marlowe 님 / 책에 푹 빠져서 읽다보면 제가 외국에 와 있다는 사실 조차 잊어버립니다. 아마 그래서 외국에 있으면 한국 책이 더 그리운가 봅니다. 인터넷으로 한국 웹싸이트를 서핑하는 것과는 분명 다른 느낌을 줍니다.

비공개 Z 님 / 너무 염장지르는 내용은 아니었지요?^^

アネゴ 님 / 책과 함께 살고 계신다니 アネゴ 님께서도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사은 님 / 사은님께서 기뻐해 주시니 더 기분이 좋아지는군요. 그래서 즐거움은 나누면 배가 된다고 말을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 변명이 아니라 실제로도 너무 아까워서 조심조심 읽게 되는군요.

아우라ny 님 / 대도시에 살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하지는 않습니다만 한국책을 볼 수 있는 서점이나 도서관이 근처에 있다는 생각을 하면 내일이라도 이사가고 싶지요. ^^

kristine 님 / Antique Bookseller 도 정말 매력적인 직업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제가 살고 있는 올바니에서 30분 거리에 사라토가라는 오래된 도시가 있고 그 곳에 가면 미국에서도 제법 알려진 고서점이 한 군데 있습니다. 그 집에 가서 진열되어 있는 고서들을 보고 있노라면 책과 함께 그것을 읽었던 사람들의 기운까지 같이 느껴지는 것 같아 마음이 훈훈해 집니다. 혹시 Richard Booth 의 My Kingdom of Books 라는 책을 읽어 보셨습니까? 한국에서도 번역이 되었다고 하던데요. 아래의 링크를 한 번 살펴 보십시오. 재미있을 겁니다.
http://www.richardbooth.demon.co.uk/

은혈의륜 님 / 저는 사실 도서관에서 직접 업무를 담당하기 때문에 오히려 잘 이용을 하지 않지만 도서관의 상호대차 서비스를 이용해 보십시오. Worldcat을 통해 한국책을 찾아서 상호대차 서비스를 통해 신청을 하면 웬만한 책은 다 구해 보실 수 있습니다. 물론 최근 한국에서 출판된 신간은 구하기 힘들지만 말입니다. 작년에 포스팅 한 글인데 한 번 참고해 보십시오. http://cliomedia.egloos.com/1051313
Commented at 2008/04/16 10:36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파란딸기 at 2008/04/16 18:27
책 때문에 행복하셨다는 글을 읽으니 괜스레 저두 기분좋아지는데요...
Commented by Clio at 2008/04/17 08:54
파란딸기님 / 기분이 좋아지셨다니 저는 더욱더 행복해집니다. 이래서 기쁨도 슬픔도 함께 나누라고 하는가 봅니다.
Commented by 한큐 at 2008/04/17 22:23
책속에서 사는 님 정말 행복하세요~~~~~
Commented by 누채 at 2008/04/18 23:51
섬세하고 다정한 글투 때문에 여자분일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의외네요. 또 한국에선 대부분의 사서분들이 여자분이라서 그렇게 생각한 것일지도요. 읽지는 않더라도 가끔 책을 사들이기는 했었는데 최근엔 책을 산 기억마저도 가마득하네요. 제겐 살짝 반성의 기회가 되었습니다.
Commented by Clio at 2008/04/19 05:59
한큐 님 / 책과 함께 사시는 모든 분들이 다 행복한 분들이지요.

누채 님 / clio 라는 아이디 역시 착각을 읽으키는데 한 몫을 하겠지요.^^ 뭐.. '반성'까지 하실 필요야 있겠습니까.

:         :

:

비공개 덧글

<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