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당시 이민자들이 입국하면서 기록에 남긴 그들의 이름과 국적 그리고 신체 상태, 최종 목적지 등을 기록한 대장은 이제 데이터 베이스로 옮겨져서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인터넷을 통해 그 이민들의 기록을 찾아 볼 수 있지요. 많은 미국인들이 그곳을 통해 자신들의 선조가 처음 미국 땅에 도착했을 때의 기록을 찾아 봅니다. 그리고 웹싸이트에서는 이민자들이 타고 왔던 배의 사진과 이민 기록 원부의 복사판을 구입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 기록들은 이민자에서부터 시작하여 이제는 미국 시민으로 살아가는 가정에서 자신들의 뿌리를 보여주는 기록으로 간직할 수도 있겠지요. 


다음을 통해 제공되는 브리태니커 백과 사전에 검색된 김동성(金東成)이라는 분은 '천리구(千里駒)'라는 호를 가진 유명한 언론인으로서 1890년 개성에서 태어나서 1969년 서울에서 세상을 떠나신 분이었습니다. 백과사전의 기록에 따르면 1915년에 미국에 유학해 오하이오 주립대학에서 신문학과를 졸업하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귀국하여 1920년 동아일보가 창간될 때 기자로 입사했고 1922년에는 초대 미국 특파원을 지내신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언론인으로서 활발한 활동을 하셨을 뿐만 아니라 한국 만화계의 탄생에 많은 영향력을 발휘하신 이 분은 나중에 해방이 되고 생긴 대한민국 정부의 초대 공보처장을 역임하셨고 합동통신사를 설립하기도 하셨더군요. 
언론재단의 자체 검색엔진을 통해 문서를 검색한 결과 천리구 김동성 선생에 관한 두 가지 기록이 있었습니다. 1975년 "신문 평론" 60호에 실린 인물론에서는 매우 자세하게 천리구 김동성 선생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더군요. 이 글에서는 국무총리까지 역임하셨던 창랑 장택상(張澤相)의 말을 인용하면서 김동성 선생은 "이미 1910년대에 미국말을 미국말답게 하는사람으로 유명"했다고 적고 있습니다. 또 다른 자료인 언론 기네스 북에는 김동성 선생이 우리 나라 최초의 해외 특파원으로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언론 기네스북에 실린 천리구 김동성 선생에 대한 설명을 읽어보면 1908년 중국의 소주에서 기독교 계통의 동오 대학에서 공부했고 그 다음 해에 미국으로 건너간 것로 나옵니다. 결국 언론 기네스북의 기록이 맞다고 한다면 1909년에 뉴욕 항에 입항한 롱도 출신의 김동성으로 기록된 사람은 바로 천리구 김동성 선생이 분명한 것 같습니다.
先生의 미주 오신 소식은 신한민보로 말미암아 듣사왔사오나 공과에 추신치를 못하여 이때껏 두어줄 글월도 올리오지 못하였소이다.
소생은, 송도 한영서원 생도로 이년간을 윤치호 씨 아래 있다가, 청국(중국) 소주로 가서 京旲大 學堂에서 일년을 공부하고 하기방학에 귀국하였다가, 어떤 선교사와 작반하여 다시 상해로 건너가 인도양으로 돌아 뉴욕에 상륙하였사오니, 이미 두 해가 가까옵니다.
先生을 마지막 뵈옵기는 송도 운계 李健爀(이건혁) 氏의 집에서 뵈었사오니 先生이 능히 기억하시올른지는, 소생의 성명은 金東成(김동성)이요, 나이는 스물 한 살이외다. 九月 十五日
국가와 민족이 이와 같이 흡업한 때를 당하야 어떻게 사람 노릇을 좀 할까 하고, 몸이 독자요 또 늙은 과거하시는 어머니를 집에 놓고 온 것을 생각지 말고 급급히 하는 공부나 하는 중이오이다.
대한 떠나실 때 평양 대성학교는 어떠한 형지 있는 것을 보시고 오셨소이까? 先生이 俄京(모스크바)에서 그 三年간 체류하시는 줄로 알았더니 어찌 그리 속히 오셨소이까?
이곳에 소생 외에 본국 학생 하나 있사오니 그는 클레몬드(California ) 小學校를 昨夏에 卒業하였소이다.
여가가 계시거든 한 장 권면의 글을 받잡기 엎드려 바라고 이에 행은 중 항상 강건하시기 기도하옵니다.
小生 金東成(김동성) 二拜


"국가와 민족이 이와 같이 흡업한 때를 당하야 어떻게 사람 노릇을 좀 할까 하고, 몸이 독자요 또 늙은 과거하시는 어머니를 집에 놓고 온 것을 생각지 말고 급급히 하는 공부나 하는 중이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