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한 나라의 엘리스: 미국 공주 한국에 오다.(1)
지난 번 포스팅에서 이야기해 드린 김동성 선생이 뉴욕 항에 도착하던 날 즉, 1909년 11월 20일에 발행된 뉴욕 타임즈에는 한국과 관련된 두 건의 기사가 실렸습니다. 그런데 두 건의  기사가  모두 한 가지 사건과 관련된 것이었는데요. 이제부터 그 사건에 관한 이야기를 해 볼까 합니다.

이 날 실린 한국 관련 기사 중의 하나에서는 당시 독일에서 한 권의 책을 출판한 엠마 크뢰벨(Emma Kroebel )이라는 여성이 "나는 정신이상자도 아니고 거짓말장이도 아니다."  라고 한 말을 옮기면서 그녀가 자신의 책에서 언급한 "니콜라스 롱워스(Mrs. Nicolas Longworth)" 부인과 관련하여 '한국에서 일어난 사건'은 모두 사실이라고 주장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의 기사는 한국에서 활동했던 선교사의 부인으로 1909년 당시에는 뉴욕주 북부의 작은 도시 유티카(Utica)에 살고 있던 존스 부인의 인터뷰 기사였는데 이 기사에서 존스 부인은 "엠마 크뢰벨이 말하는 '한국에서 일어난 사건'이 있었을 때 자신은 서울을 떠나 있었지만 만일 그런 일이 실제 일어났다면 나중에 서울로 돌아간 자신에게도 분명히 알려졌을 것"이라고 하면서 엠마 크뢰벨의 주장을 부정하는 듯한 말을 하고 있었습니다. 아울러  존스 부인은 "(한국에 있을 때)엠마 크뢰벨이라는 사람의 이름을 들어 본 적이 없다"고도 말했습니다. 과연 '한국에서 일어난 사건'은 무엇이었을까요? 그리고 기사에서 말하는 엠마 크뢰벨과 니콜라스 롱워스 부인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요?

먼저 독일 여성 엠마 크뢰벨에 관한 이야기부터 시작하겠습니다. 그녀는 독일에서 태어난 여성으로서 한국에도 어느 정도 알려진 인물입니다. 왜냐하면 1905년 경에 그녀는 서울에 있으면서 대한 제국의 황실에서 의전을 담당하는 일을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직 서양식의 의전 행사에 서툰 대한 제국 정부에서 각 국의 외교 사절들을 맞이하여 치르게 되는 여러 행사에서 그녀의 역할은 상당히 중요한 것이었지요.

그렇게 1년 정도의 한국 생활을 마치고 독일로 돌아간 그녀는 한국에서 자신이 경험한 것을 기록하여 1909년에 한 권의 책을 펴냈는데 그것이 "내가 어떻게 조선의 궁정에 들어가게 되었는가(Wie ich an den koreanischen Kaiserhof kam)"라는 책입니다.(이 책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무지개님의 블로그 글을 참고하십시오.) 위에서 인용한 신문 기사에서 말하는 책이 바로 이 책이지요. 그렇다면 이 책의 무엇이 문제였을까요? 이 질문에 답하기 전에  논란의 중심에 있는 또 다른 주인공 니콜라스 롱워스 부인에 대해서 먼저 살펴 봐야겠습니다.

1909년의 뉴욕 타임즈 기사에서 니콜라스 롱워스 부인으로 불리던 이 여인의 결혼 전 이름은 엘리스 루즈벨트(AliceRoosevelt, 1884-1980) 였습니다. 테디(Teddy)라고 불리던 미국의 제 26 대 대통령 시어도어 루즈벨트(Theodore Roosevelt, 1858-1919)가 그녀의 아버지였지요. 1901년 9월에 제 25 대 미국 대통령이던 맥킨리가 뉴욕 주 버팔로에서 암살을 당하고 당시 부통령이던 루즈벨트는 대통령 직을 승계합니다. 이 때 엘리스의 나이는  꽃 같은 열 일곱 살이었고 그녀는 각 종 신문에 "엘리스 공주(Princess Alice)" 로 불리며 일약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습니다. 1902년 1월에 백악관에서 있었던 그녀의 사교계 데뷔 파티는 미국은 물론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도 앞다투어 보도하였다고 합니다.
이처럼 화려하게 사교계에 데뷔한 '엘리스 공주'였지만 그녀의 성장 과정은 그리 순탄치만은 않았습니다. 1884년 뉴욕의 맨하튼에서 그녀가 태어난지 이틀 만에 역시 엘리스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던 그녀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같은 날 그녀의 외할머니도 병으로  세상을 떠났지요. 이러한 갑작스러운 죽음에 충격을 받은 그녀의 아버지 시어도어는 갓 태어난 딸을 여동생에게 맡기고 서부로 떠나버립니다.

몇 년 후 그가 다시 뉴욕으로 돌아왔을 때에는 그의 곁에 새로운 아내가 같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시어도어는 뉴욕 주의 상원 의원과 뉴욕 주지사를 거치며 바쁜 정치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태어나자 마자 얼굴도 제대로 보지 못 하고 세상을 떠난 어머니와 정치 활동에 바빠 제대로 얼굴조차 볼 수 없었던 아버지로 인해 어린 엘리스는 많은 외로움을 느겼다고 합니다. 물론 새 어머니가 있었지만 그녀는 몸이 약해서 앓아 눕는 일이 많았고 또 엘리스 밑으로 태어난 동생들이 있다보니 엘리스가 느끼는 외로움을 채워주기에는 역부족이었지요.(아래의 사진은 1902년 경의 가족사진인데 사진의 가운데에 흰 모자를 쓰고 서 있는 소녀가 엘리스입니다.)
아버지의 사랑과 관심에 목말라한 엘리스가 그것을 얻기 위해 선택한 방법은 반항적이고 엉뚱한 행동들이었습니다. 결국 그러한 행동은 그녀를 매우 독립적이고 활발한 말괄량이와 같은 여인으로 만들었는데 이런 모습은  순종적이고 다소곳한   숙녀의 모습을 최고로 간주하던 당시 상류 사회 여성들의 기준과는 많이 달랐습니다. 사냥을 즐기고 거친 야외 생활을 좋아하던 아버지 시어도어의 성격이 유전된 것이라 볼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엘리스는 당시의 일반적인 여성들과는 달랐습니다.

술도 잘 마시고 공개적으로 담배도 피웠으며 직접 자동차를 운전하고 다니는가 하면 경마장에서 남자 도박사들과 어울려 도박을 하거나 포커판에서 남자들과 함께 게임을 즐기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백악관에서 애완 동물로 뱀을 키울 정도로 엉뚱하기도 했지요. 오죽했으면 아버지인 시어도어가 "나는 나라를 통치하던가 아니면 딸을 단속하던가 둘 중의 한 가지 밖에 할 수 없다. 이 두 가지를 같이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라고 공개적으로 말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선머슴애 같은 행동과 달리 엘리스는 누가 보아도 감탄할 만한 미모의 소유자이기도 했습니다.  그것은 그녀의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것이라 할 수도 있는데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사교계의 행사에 나타나는 그녀는 단연 주위의 시선을 끌었고 이런 그녀를 신문에서는 앞다투어 보도하면서 그녀는 당시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여성 중의 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녀의 드레스 디자이너가 그녀를 위해 특별히 만든 푸른색의 옷감은 "Alice Blue" 라는 이름이 붙어 최고의 유행 상품이 되었고 그녀에게 바치는 노래까지 만들어지기도 했지요. 아마 요즘의 연예인 이상의 인기를 얻었던 것 같습니다. 더구나 19세기의 전통이 여전히 남아 있던 사회에서 그녀는 정말 미국의 공주와 같은 존재가 되었지요.
그러던 그녀가 1905년에 수 십명의 상원 의원들 그리고 정부의 관리들과 함께 아시아 순방길에 오릅니다. 배를 타고 태평양을 건너 일본에 도착한 그녀는 명실상부한 '미국의 공주' 로서 대접을 받습니다. 천황과의 만찬, 무도회 등의 행사가 이어졌고 이어서 필리핀과 중국을 계속해서 방문했습니다. 중국에서는 서태후를 만나 진귀한 보석, 비단 등과 함께 애완견까지 선물을 받았지요.그러던 그녀가 중국에서 미국 군함 오하이오 호를 타고 서해를 건너 인천에 도착한 것이 1905년 9월 19일 이었습니다. 서두에서 말씀드렸던  '한국에서 일어난 사건' 이 이제 바야흐로 시작되려는 참입니다.

그녀의 한국 방문에 대해 당시 대한 제국에서 남긴 기록을 찾는 일은 힘들었지만 영어로 된 기록은 큰 어려움 없이 찾을 수 있었습니다. 1905년  감리교의 선교사로서 한국에 와서 활동하던 호머 헐버트 박사는 한국인보다 더 한국을 사랑한 외국인으로 알려져 있는데 당시 그 분은 "Korean Review"라는 영문 잡지를 서울에서 발간하고 있었습니다. 이 잡지에서는 한국의 여러 가지 풍습과 문화 그리고 정치와 사회에 관한 내용들을 영어로 소개하고 있는데 그 중에는 당시 서울에서 일어났던 여러 가지 일들이 짧은 단신의 형태로 실려 있습니다. 그리고 이 잡지의 1905년 9월 호에 엘리스 루즈벨트의  한국 도착 소식이 비교적 자세하게 실려 있었습니다.

9월19일 미스 엘리스 루즈벨트와 그 일행이 군함 오하이오 호를 타고 제물포에 도착했다. 그들은 특별 열차를 타고 바로 서울로 떠났는데 객차와 기관차는 미국, 한국 그리고 일본 국기로 장식되어 있었다. 많은 한국 관리들과 군대의 장교 그리고 황실 근위대와 군악대, 각 국 공사들이 역에 도착하는 이들을 환영하러 왔으며 이들이 가는 길에는 구경꾼들이 쇄도했다. 미스 루즈벨트를 위해 황실에서는 황실 가마를 배정했고 모든 일행들에게도 관청의 가마를 준비했다. (서울에 있는) 모든 집들에는 미국과 한국 국기가 내걸렸는데 내걸린 미국 국기 중에는 별이나 줄무니(Stripe)가 빠진 경우도 있었고 색깔도 여러 가지였다. 그러나 국빈에게 경의를 표하려는 사람들의 공통된 의지를 보여주기에는 충분했다.
 
20일에 미스 루즈벨트는 방문단 일행과 함께 황실을 예방하고 한국 정부의 관리들과도 인사를 나누었다. 21일에는 미국 공사가 주최하는 가든 파티가 열렸는데 그 자리에서 한국에 거주하던 미국인들이 미스 루즈벨트와 그 일행들을 만났다. 22일에는 미스 루즈벨트가 황제 폐하와 점심을 함께 했으며 오후에는 동대문(East Gate) 밖에 있는 황제비의 무덤을 방문했다.(당시까지 청량리에 있던 명성황후의 무덤인 홍릉을 말하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지금은 홍릉 수목원으로 바뀐 그 곳인것 같습니다)

23일에는 동궐(East Palace)에서 가든 파티가 열렸고 그날 미스 루즈벨트는 한국인 여성 기독교인들을 상동 교회에서 만났으며 스크랜튼 박사 댁의 넓은 정원에서 한국에서 활동하는 선교사들과 자리를 같이 하였다. 이 자리에서 가죽으로 표지를 장식한 한국어 성경책과 찬송가 책을 미스 루즈벨트에게 선물하면서 언드우드 박사가 짧은 연설을 하였고 모르간 공사가 화답하였다.

독일 공사관 만찬, 북한산으로 승마, 일본 여학교 방문과 기타의 여러 일정을 마친 방문단은 9월 29일에 서울을 떠나 특별 열차 편으로 부산으로 출발했다. 그러나 최근에 있었던 홍수로 인해 철도의 사정이 좋지 않아 일행은 대구에서 하루를 묵었고 대구에 거주하던 선교사들이 이들을 접대했다.

이 후 부산에 도착한 일행은 현해탄을 건너 일본의 시모노세키로 갔고 다시 태평양을 건너 씨애틀에 도착한 것이 10월 말이었습니다. 배에서 내리는 엘리스 곁에는 각 국에서 받은 선물과 함께 중국에서 구입한 엄청난 양의 실크가 든 상자가 가득했었다고 하는군요.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순방길에 동행했던 오하이오 주의 상원의원 니콜라스 롱워스와 백악관에서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자, 그렇다면 이 글의 서두에서 말한 '한국에서 일어난 사건'은 무엇일까요? 말괄량이 미국 공주가 과연 어떤 해프닝을 한국에서 벌였을까요? 다음 글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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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lio | 2008/04/17 11:02 | 역사이야기 | 트랙백(1) | 핑백(1) | 덧글(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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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ed from likejazz' me.. at 2008/04/18 14:36

제목 : likejazz의 생각
대한제국을 유린한 미국 공주 (1) (2)...more

Linked at Cliomedia : 조용한.. at 2008/04/18 01:47

... ** 1 편의글 마지막에서 제가 감히 저지른 절단 만행에 분노하여 직접 뉴욕 타임즈를 찾아 보신 분들의 덧글을 보고 자칫 스포일러가 올라오겠다 싶어 부랴부랴 글을 마저 올립니다.^^ 엘리 ... more

Commented by Aleph-null at 2008/04/17 11:06
오호 기대하겠습니다 :)
Commented by 곰부릭 at 2008/04/17 11:49
오마나 2편이 기대됩니다^^
Commented by 은현 at 2008/04/17 11:50
악. 다 .. 다음글이라뇨;;
Commented by 초아 at 2008/04/17 11:59
기다려 집니다
Commented by 풀잎열매 at 2008/04/17 12:52
다, 다음글.....
Commented by killroo at 2008/04/17 13:14
이런 절묘한 절단신공이!!!
Commented by 이오냥 at 2008/04/17 14:20
제일 궁금한 곳에서 뚜비컨니뉴드라니...;ㅁ;) Clio님 너무하신 거 아닌가요!
Commented by 케야르캐쳐 at 2008/04/17 14:36
아악-! 가장 궁금해지려는 찰나에...... 책을 읽으시면서 이런 내공도 기르시는군요.;
Commented at 2008/04/17 15:51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clair at 2008/04/17 16:45
이 정도까지 되면 어쩔 수 없네요
..링크 신고합니다 :D
Commented by dARTH jADE at 2008/04/17 16:48
헙! 흥미진진하게 읽고 있었습니다@
Commented by 유월향 at 2008/04/17 16:48
... 2편은 언제쯤... lllOTL
일부러 그러신거죠!!!
Commented by 쥐™ at 2008/04/17 16:53
2년 너무 기대 됩니다ㅠㅠ
링크 신고할수밖에 없어요!! 꺄아>_<
Commented by marialove at 2008/04/17 17:58
이렇게 링크 신고를 하게 만드시다니... 절묘한 내공입니다 +_+!
Commented by 구보 at 2008/04/17 18:27
글 재미있게 보고 갑니다. 뒷 이야기도 궁금하네요
Commented by 빈센트 at 2008/04/17 18:32
러브스토리 아님 검은 베일의 정치드라마?? 한편의 영화를 보는 느낌입니다.
2편을 기대합니다..
Commented at 2008/04/17 19:59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루크 at 2008/04/17 20:46
이건 만화책 다음 권의 판매부수를 올리기 위한 혹은 드라마 시청률을 높이기 위한
낚시 결말 '다음에 뭐가 있을지 궁금하지롱' 전법 아닙니까?
너무 하십니다!
Commented by 에바 at 2008/04/17 21:20
마지막 절단신공에 낚였어요 파닥파닥.
Commented by 물씨 at 2008/04/17 22:44
절단신공에 분노하며 뉴욕타임즈를 뒤졌군요. 뉴욕타임즈의 검색시스템은 참 좋더라구요.
뭔가 스포일러가 될 듯하여 링크는 달지 않으나 저처럼 마음 급한 분들은 찾아보심이 :)
Commented by Clio at 2008/04/19 05:30

Aleph-null 님, 곰부릭 님, 은현 님, 초아님, 풀잎열매 님, killroo 님, 이오냥 님, 그리고 케야르캐쳐 님 / 휴...숨차다. 2편 올라 갔으니 너무 미워하지 말아주세요. killroo 님 말씀처럼 절단 신공을 수련 중입니다.^^

비공개 k 님 / 2편을 보셨으니 아시겠지만 이 사건을 읽고 제가 가진 질문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clair 님, dARTH jADE 님, 유월향 님, 쥐™ 님, marialove 님, 구보 님 , 그리고 빈센트 님 / 링크 신고는 제가 의도한 바가 아니었는데.... 앞으로 종종 이용해야 되겠습니다.^^ 링크해주셔서 감사드리고 또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2편도 재미있게 읽으셨기를 바랍니다.

비공개 t 님 그리고 물씨 님/ 두 분의 '위협'에 2 편을 얼른 올렸습니다. 대신 뉴욕 타임즈에는 나오지 않는 내용도 있지요. 이런 기록을 보존하고 있다는 사실이 늘 부럽답니다.

루크 님 그리고 에바 님 / 낚시성으로 절단한 것은 아니지만 어떻게 하다보니 그런 결과가 나왔네요.^^ 그래서 2편은 빨리 올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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