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교수님들과 학생들의 연구를 지원하기 위해 만들어진 대학교 도서관에서는 책을 고를 때도 신중하지만 책을 버릴 때도 마찬가지입니다.비록 대출 횟수는 적어도 연구에 필요한 중요한 책은 쉽게 서가에서 치우지 않습니다. 하지만 계속해서 새로이 판되는 책 때문에 소장 공간이 늘 걱정이지요. 그래서 출판된지 오래되었고 대출 횟수가 적어진 책들은 별도의 보관 시설을 따로 만들어 보관하기도 합니다. 저희 도서관에서도 그런 책들을 보관하기 위해 움직이는 서가 장치를 이용한 밀집 서고를 이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이용자께서 책을 찾으시면 직원들이 그곳에 가서 책을 꺼내 옵니다.
그런데 저는 밀집 서가에 있는 책이 필요한 경우 가능하면 직접 지하에 있는 서고에 들어가서 책을 꺼내오려 합니다. 물론 일반 이용자들처럼 담당 직원에게 책을 신청하고 편안하게 사무실에서 받을 수도 있지만 도서관 사서로서 일반 이용자들이 들어갈 수 없는 밀집 서고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을 특권이라고 생각하는 터라 즐겁게 다녀옵니다. 오래된 책들로부터 풍겨 나오는 냄새가 좋고 서늘하다 못해 한기가 도는 밀집 서고 안이 제게는 아늑하기만 합니다. 그래서인지 그 곳에서 하루 종일 근무해야 하는 직원은좋아라하며 그곳에 찾아 오는 저를 보면서 상당히 특이한 취미를 가졌다고 농담삼아 이야기 합니다.
며칠 전에도 그랬습니다. 찾아 볼 책이 있어서 밀집 서고에 들어갔습니다.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서 필요한 책을 찾아들고 내려오려는데 아무런 특이한 점도 없는 책 한 권이 왠지 제 눈을 끌었습니다. 얼핏 보기에 오래되어 보이는 책인 듯 했지만 그리 눈을 끄는 장식이 된 책도 아닌데 한 번 꺼내 보고 싶은 생각이 들더군요. 아마 책등에 인쇄되어 있던 책의 제목이 다 지워져서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더 호기심이 생겼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책을 꺼내 들고 보니 책벌레(Book Worm)라는 제목이 눈에 들어오더군요. '책벌레'라니... 저의 불치병인 호기심이 또 발동했습니다. 그 책과 원래 필요했던 책을 모두 꺼내 들고 사무실로 돌아와서는 정작 찾으러 갔던 책은 젖혀두고 그'책벌레'에 관한 책을 살펴보기 시작했습니다.

이 책은 IN THE TRACK OF THE BOOK-WORM; Thoughts, Fancies, and Gentle Gibes on Collecting and Collectors by One of Them 이라는 긴 제목을 가지고 있습니다. 표지를 열고 첫 페이지를 보니 특이하게도 붉은 잉크로 인쇄된 메세지가 보이는데 흥미로운 이야기를 하고 있더군요. 이 책은 590 권만이 인쇄되었고 각 권에는 고유 번호와 함께 저자의 서명이 들어 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제가 가지고 서고에서 가져온 책에는 436번이라는 번호와 함께 저자인 어빙 브라운(Irving Browne) 씨의 싸인이 있었습니다.
책의 말미에는 1897년 이 책을 인쇄한 엘버트 허바드씨의 자신감에 넘친 문구도 들어있더군요. 고급스러운 종이에 참 정성껏 만들어진 이 책의 저자인 어빙 브라운씨가 누구인가 싶어 잠시 찾아 보았습니다.
어빙 브라운씨는 1837년 뉴욕 주의 마샬이라는 작은 도시에서 태어난 분으로서 아버지는 교회의 목사님이셨다고 합니다. 브라운씨는 1857년에 올바니 법대를 졸업하고 올바니 시 인근의 트로이 시에서 변호사 개업을 했습니다. 법대를 졸업하면서 제출한 논문이 교수들의 추천으로 법률 전문 학술지에 실릴 정도로 뛰어난 학생이었다고 합니다. 변호사로서 활동을 하면서 Albany Law Journal 의 편집자로서도 많은 공헌을 한 이 분은 문학과 예술 등 다방면에 관심이 많았다고 합니다. 특히 문학적인 재능이 있어 시를 발표하기도 하고 여러 편의 희곡을 쓰기도 했다고 합니다.
트로이 시와 올바니 시에서 평생을 변호사로서 활동하다가 말년에는 뉴욕 서부의 버팔로 시로 은퇴하여 1899년에 세상을 떠나셨는데 아마 그런 이 분의 배경 때문에 이 책이 지금 저희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표지 안쪽을 살펴보니 트로이 시의 공공 도서관에 소장되어있을 때 붙어 있던 장서표(Book Plate)가 붙어 있더군요. 아마 어떤 이유에서인지 그 곳에서 우리 도서관으로 책이 넘어왔나 봅니다.

문학과 예술 다방면에 걸친 관심과 더불어 브라운씨가 사람들에게 알려진 또 다른 모습은 책을 열정적으로 수집하고 사랑하는 책수집가(Book Collector)로서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책에서는 책수집가로서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책과 관련된 여러 가지 이야기들을 소개하고 있는데요. 브라운씨는 19세기말 지식인의 세련되고 유려한 문장으로 책과 책을 사랑하는 책 벌레들에 관한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책벌레에 관한 이야기들을 하고 있는 각 장마다 말미에는 그 장의 주제와 관련된 시를 한 편씩 수록해 놓았더군요. 시적이면서도 유머가 가득한 이 책을 읽는 것은 큰 즐거움이었습니다. 아울러 책의 내용을 잘 살려주는 특이한 편집과 컬러 인쇄를 보는 것도 흥미로웠습니다.
그런데 목록을 살펴보니 공공 사서(Public Librarian)라는 장이 있더군요. 과연 브라운씨는 도서관 사서들에 대해 어떤 생각을 했을까 궁금하여 찾아보고는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브라운 씨의 표현을 빌리자면 사서들은 책벌레들 중에서도 매우 가련한(pitiable) 종류에 속한다고 합니다. 그토록 보석과 같이 아름다고 소중한 책들과 함께 살면서 호기심 많은 이용자들에게 그 책들을 보여주고 빌려주지만 정작 자신들은 그 책에 대해 일순간이라도 소유권을 행사할 수 없는 그런 안타까운 운명의 소유자들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브라운씨는 자신이 어렸을 때 사서들에게서 간혹 보았던 이해할 수 없었던 태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좋은 책을 도서관에서 빌리려 할 때 사서들이 보여주던 그 눈길, "아니 어떻게 그런 책을 찾지?" 놀라워하고 의아해 하면서 마지 못해 자리에서 일어나 책을 꺼내오면서 못내 빌려주고 싶어하지 않는 그 태도 때문에 사서들이란 책을 최대한 이용자들로부터 멀리 두고 감추려하는 사람인 줄 알았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자신이 책수집가가 되고 보석같은 그 책들을 사랑하게 되자 자연스럽게 예전 그 사서들의 표정과 마지 못해 하던 태도를 이해하게 되었다고합니다. 그러면서 그는 사서들에게 바치는 한 편의 시를 실었는데 그 시의 말미에서 사서들의 그런 마음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할 수 없다는 듯 내뱉는 한숨과 함께 그는 이렇게 한탄한다.
'불행한 인생, 이런 보석을 보여주고 또 빌려주도록 운명지어진 사람들,
나는 그저 지키고 있을 뿐 소유할 수는 없다네.'

사실 우리에게는 아직 낯선 일들입니다만 오래된 책을 수집하는 취미는 서구에서는 이미 오래 전부터 내려오는 일입니다. 어빙 브라운씨가 살았던 19세기 말쯤이면 이미 유명한 고서 수집가들이 있었고 매우 높은 가격으로 고서들이 거래되었습니다. 국내에도 이와 관련된 책이 번역된 것이 있는 것으로 압니다만 책을 좋아하시는 분들이라면이렇게 책에 미친 사람들(장서광, 藏書狂,Bibliomaniac)에 관한 이야기들을 좋아하실 겁니다.
브라운씨가 하는 말에 따르면 진정한 의미의 장서광(bibliomaniac)이 되기 위해서는 책에 대한 사랑을 가지고 있지만 그 사랑을 만족시키기 위한 수단은 어느 정도 제한된 상태라야만 한다고 합니다. 그렇게 해야만 더 책을 사랑하고 책의 귀중함, 그리고 자신이 원하던 책을 천신만고 끝에구했을 때의 기쁨을 알 수 있다는 것이지요. 이 책에서 브라운씨는 장서광들의 천국에 부자들을 위한 자리는 없다고 말합니다. 같은 책을 구입하더라도 부자가 구입하는 것과 빈약한 지갑을 가진 사람이 구입하는 것은 마치 그물을 던져 물 속에 있는 모든 물고기를 한꺼번에 끌어올리는 사람과 오랫 동안 낚시를 드리운 끝에 살찐 숭어를 한 마리 잡아 올리는 사람과 비교된다는 것입니다. 결국 경제적인 제약에도 불구하고 가지고 싶은 책을 구입했을 때 느끼는 기쁨이 더 크다는 것이지요.
한 책 수집가가 책 수집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는 이 한정본은 그 가격이 얼마나 될까요? 저는 사서로서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가격이 너무 높을 경우 귀중본 실로 옮겨야 하니까요. 그래서 몇 몇 헌책방들을 찾아보니 다행히(?) 40-50 달러 정도에서 가격이 형성되어 있는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 책에 실린 시들만을 따로 모아 1899년에 역시 한정본으로 펴낸 책들은 100 달러가 넘어가더군요. 그런데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의 인터넷과 컴퓨터 시대는 전혀 생각하지 못한 놀라움과 편리함을 우리에게 안겨 줍니다.
혹시 제 글을 읽고 나서 이 책을 읽어 보고 싶은 마음이 생기신 분들은 옆의 링크를 따라가십시오. Internet Archive 에서는 이 책을 고해상도로 스캐닝하여 PDF 파일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인터넷을 통해 누구나 접할 수 있게 해 두었습니다. 컬러와 흑백 버전을 제공하고 있고 또 책의 내용을 텍스트 파일로 만들어 두었습니다. 저작권이 소멸된 책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겠지요. 헌 책 값을 검색하다가 이 사실을 확인하고는 기분이 묘해지더군요. 사실은 개인적으로 이 책을 구입하고 싶었던지라 이제 고민이 한 가지 생겼습니다.
과연 손으로 만질 수있는 책을 수집해야하나 아니면 잘 스캐닝된 파일을 저장해 두고 컴퓨터로 읽어 볼까 혼자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이 책을 손에 들고 페이지를 넘길 때 느껴지는 세월의 무게와 향기 그리고 책에 담긴 저자와 인쇄공의 정성을 느끼고 싶은데 ... 어떻게할까요? ^^
* 이 글을 위해 참고한 자료입니다.
“IRVING BROWNE AND HIS BOOKS.,” New York Times February 18, 1899.
“Irving Browne's Books.,” New York Times March 11, 18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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