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본업계에 종사하는 사람들 중에 누구라도 좋으니 왜 제대로 끝을 가다듬지도 않은 종이나 심지어 채 자르지도 않은 페이지를 그대로 둔 책을 만들어내는지 그 이유를 이성적이고 사리에 맞는 설명을 해 주신다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지난 여러 해 동안 나는 바다 건너에서 넘어온 이런 속물적인 유행 때문에 종종 불쾌감을 느낍니다. 도대체 왜 이 따위 불편하고 쓸모없고 겉치레에 불과한 유행을 수입해 와야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Judson 씨가 말하는 "끝을 가다듬지도 않은 종이나 심지어 채 자르지도 않은 페이지를 그대로 둔 책"을 원문 그대로 옮기면 이러합니다. "deckel edges and uncut leaves", 도대체 이것들이 무엇이길래 Judson 씨를 화나게 만들었을까요? 혹시 주위에 책이 있거든 어떤 책이라도 좋으니 한 번 들고 살펴보십시오. ![]() 우리가 가정에서 하는 인쇄와 달리 전문적인 인쇄소에서 책을 인쇄할 때에는 큰 종이에 여러 페이지를 한 꺼번에 인쇄합니다. 그리고나서 책을 제본하기 전에 그 큰 종이를 여러 차례 접습니다. 물론 이렇게 접었을 때 페이지가 제대로 위치를 찾아가게 하기 위해서 미리 계산을 한 후에 인쇄를 하지요. 그런데 이렇게 종이를 접어서 인쇄를 하게 되면 종이를 접은 면이 책등의 반대편 즉, 책 배나 책의 윗 부분에 나타나게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제본을 마친 후에는 책의 모서리를 절단기로 잘라서 이렇게 접힌 부분을 없애 줍니다. 그렇게 하면 페이지 하나 하나가 때로 떨어지면서 책을 읽을 수 있게 되지요. 대부분의 경우 이렇게 절단할 때에는 직각으로 하지만 때로는 둥근 곡면으로 처리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아래의 사진은 일반적인 책의 모서리 절단면입니다. ![]() ![]() 위의 사진에서 보시듯 종이 끝을 가다듬지 않은 경우는 좀 보기가 싫어서 그렇지 읽는데는 지장이 없습니다. 그런데 접은 면을 아예 제대로 자르지 않은 Uncut Book 은 당장 읽기가 힘이 듭니다. 사진에는 두 페이지의 윗 쪽이 붙은 것처럼 보입니다만 한 페이지로 보이는 부분도 실제로는 책 배 부분이 붙은 두 페이지입니다. 이 책을 읽기 위해서는 먼저 윗 부분을 자르고 난 후 책 배 부분을 다시 잘라야 합니다. 결국 이런 책을 읽을 때에는 종이를 자르는 칼을 들고 페이지를 잘라 가면서 읽어야 하는거지요. 바로 이 점이 Judson 씨를 화나게 한 것입니다. 그래서 Judson 씨의 글은 계속 이어집니다. "도대체 왜, 제대로 제본이 되어 있으리라 생각하고 구입한 책을 읽다가 네번째 페이지에서 온 집안을 헤매 종이칼을 찾아 와야 하고 그 책을 다 읽을 때까지 마치 주부가 감자를 깍듯이 페이지 사이를 칼로 찌르고 잘라야합니까? 영국에 있는 우리 착한 사촌들은 이런 불필요한 기계적인 활동에 낭비할 시간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바다 건너 이 쪽에 사는 우리는 너무 바쁘고 그렇게 참을성이 없습니다."이렇게 제대로 잘라지지 않은 책에 대한 불만을 한 참 늘어놓은 Judson 씨는 제발 "제본을 완전하게 마친 후에 서점에 책을 내놓으라"고 기사에서 강하게 부탁을 하였습니다. Judson 씨의 글을 보면 이런 잘라지지 않은 책을 만들어 판매하는 것은 미국 보다는 유럽에서 더 성행했던 것 같습니다. 실제 지금도 헌책방이나 큰 도서관에서 발견되는 이런 책들 중에는 유럽에서 출판된 것이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19세기 뿐만 아니라 20세기 중반까지도 이런 방식으로 만들어진 책이 프랑스와 이탈리아 그리고 독일 등지에서 출판되었습니다. 옆의 사진에서 보시는 책은 1940년대 이탈리아에서 출판된 책입니다. 그리고 제가 본 책 중에서 가장 최근에 출판된 것은 1989년 이탈리아에서 출판된 중세 철학책이었습니다. 하지만 유럽에 살던 사람들이 모두 이런 방식의 책을 좋아 했던 것은 아닌 듯 합니다. 일례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찰스 다윈과 같은 사람은 "미국에서 하고 있는 그와 같은 모서리를 자르는 출판 방식을 영국에서도 도입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어디 있느냐"고 하면서 페이지를 빨리 넘길 수 있게 잘라진 책들을 옹호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Judson 씨의 기사가 나온 것보다 20년전 쯤인 1883년에 역시 미국에서 출판된, Appleton's Literary Bulletin 에서는 이러한 자르지 않은 책들에 대해 Judson 씨와는 좀 다른 주장을 하고 있는 기사가 실렸습니다. "모서리가 모두 잘라진 책들은 의심할 여지없이 잘라지지 않은 책 보다 읽기가 훨씬 더 편하다. ... 이런 책들은 훨씬 시간을 절약하게 해주고 또, 평이하고 실용적인 상식(common sense)의 결과물이다. 그 점은 분명 인정한다. 그리고 평이하고 실용적인 상식을 가진 사람들은 이 논쟁에서 자기 의견을 매우 성공적으로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까지는 Judson 씨와 비슷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으로 넘어 가면서 이 글의 저자는 잘라지지 않은 책이 가진 매력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지요. "잘라지지 않은 책은 단지, 그리고 아마도 전적으로 취향의 문제일 것이다. 그런데 왜 그것을 더 좋아하는가에 대해서는 취향만으로는 설명하기 불가능하다. 책을 읽는 독자가 이와 같은 잘라지지 않은 책의 아름다움을 느끼지(Feel) 못 했다면 그 사람에게 그 아름다움을 보여줄 수 있는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마치 이것은 색깔에 대한 감각이 없는 사람들에게 색깔을 설명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도저히 말로는 전달할 수 없는 그런 느낌이다. ... 만일 진정으로 예술적인 것에 대해 타고난 감각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 두 가지 종류의 책을 아주 사려깊게 살펴봄으로써 잘라지지 않은 책들이 가진 월등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을런지도 모르겠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말은 바로 이럴때 사용할 수 있는 말이리라."이 글에서는 잘라지지 않은 책이 가진 아름다움에 대해 마치 누구의 손때도 묻지 않은 미지의 장소에 도착한 최초의 탐험가가 발견한 자연의 아름다움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책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이처럼 잘라지지 않은 책을 보면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매력과 신선함을 느낀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매력은 매끈하게 모서리를 자른 책들에서는 도처히 찾을 수 없는 것이라고 하면서 접혀진 종이를 제본한 후 절단기로 모서리를 자르는 제본가들의 작업은 책이 가진 태초의 아름다움을 파괴하는 행위라고도 하고 있고 있습니다. 어찌 보면 할 일 없는 사람들의 말장난처럼 보일 수도 있는 이 글은 이렇게 끝을 맺고 있습니다. "실용적인 상식을 가진 사람들은 자신들이 이해할 수 없는 일들에 대해서는 비웃곤 한다. 하지만 이른바 실용적인 상식을 시시한 속물근성으로 보는 '문화'라는 것이 존재하고 이런 (문화의) 취향 가진 사람들은 속물들의 비웃음이 '부족한 지식'에서 비롯된 것임을 잘 알고 있다." 결국 이 글의 저자는 실용성을 추구하여 매끈하게 잘라진 책을 선호하는 사람들은 책이 가진 진정한 아름다움을 이해하지 못 하는 속물로 보고 있는 듯 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이렇게 페이지가 잘라지지 않은 책을 읽는 것은 페이지가 이미 잘라진 책을 읽는 것과 어떻게 다를까요? 도서관에서 일을 하며 종종 저는 이런 잘라지지 않은 책들을 접합니다. 그 중에는 정말 제가 읽고 싶은 책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몇 해 전에 기념품으로 받은 종이칼을 책상 곁에 늘 두고 이런 책이 있으면 페이지를 잘라가며 읽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페이지를 잘라가며 책을 읽을 때면 훨씬 더 책에 집중하는 저 자신을 발견합니다. 한 페이지를 읽고 종이 칼로 조심스럽게 페이지를 자르는 몇 초 동안 그 페이지에서 읽은 내용을 생각하고 또 다음 페이지에는 어떤 내용이 있을지 혼자 상상합니다. 그리고 이 책이 만들어진 이래 아무도 이 페이지를 읽지 않았다는 생각을 하면 정말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는 사람의 느낌이 듭니다. 물론 이 책이 한 부만 만들어진 것도 아니고 이미 같은 내용을 읽었을 사람이 많이 있겠지만 적어도 내 손에 놓인 이 책을 읽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사실이 저를 흥분시킵니다. 비록 제가 책을 "읽고" 있지만 페이지를 자르는 그 순간 저는 마치 제가 그 책을 "쓰고" 있는 것 같다는 정말 뭐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느낌을 받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리고 페이지가 잘라지지 않은 책은 아직 완성되지 않은 책이고 비로소 내가 페이지를 자르고 읽음으로서 하나의 책이 탄생한다는 생각을 할 때도 있습니다. 아마 19세기의 사람들이 느꼈을 형언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 바로 그런 생각에서 나온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더구나 최근에는 이런 책이 아주 드물게 만들어지다 보니 제가 읽는 잘라지지 않은 책은 최소한 몇 십년 혹은 백 년 이상 이상 묵은 책들입니다. 그렇다 보니 저는 19세기의 사람들이 느꼈던 것 이상의 흥분과 매력을 느낍니다. 마치 땅 속에 숨겨진 보물 지도를 발견하고 한 겹, 한 겹 벗겨나가는 심정이랄까요. 물론 이렇게 종이칼로 자른 책들이나 글의 서두에서 이야기한 종이 끝을 정리하지 않은 책들이 가지는 단점도 있습니다. 먼지가 앉기 쉽고 또 페이지 사이에 생기는 공간에 때로는 여러 가지 반갑지 않은 손님들이 방문을 하는 경우가 있지요. 손님이 떠난 뒷자리에 거미줄이나 갉아 먹어 구멍이 난 페이지가 발견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리고 급한 마음에 손가락을 사용해서 자르다 보면 아래와 같은 아름답지 않은 결과가 나올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렇게 페이지를 잘라가면서 읽은 책들은 다 읽은 후에도 또 다른 매력이 있습니다. ![]() 아울러 이와 같은 잘라지지 않은 책은 책을 어디까지 읽었는지 겉에서 보는 것만으로도 알 수 있다는 장점도 있습니다. 동료 사서중에는 이런 경험을 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우연히 19세기 말 강의에서 사용되었던 강의 계획서를 발견했는데 그 안에는 수업을 위해 반드시 읽어야 하는 필독서들이 나열되어 있고 도서관에 그 책이 있다는 사실과 청구 기호까지도 강의 계획서에 자세하게 나와있더라는 겁니다. 그래서 혹시나 하고 서가에서 그 책을 찾아보았더니 처음 10여 페이지만 페이지가 잘려져 있고 책의 나머지는 아직 그대로 페이지들이 붙어 있더라고 하더군요. 물론 책을 사서 읽은 학생들도 있겠지만 얼마나 학생들이 교수님의 말을 잘 들었는지 알 수 있는 예였다고 우스개 삼아 이야기 하더군요. 그런데 그렇다고 하더라도 19세기의 모든 사람들이 그런 방식으로 페이지를 하나하나 잘라가며 이런 책들을 읽었다고는 생각하지 마십시오. 당시의 기록들을 보면 자르지 않은 책을 사와서 먼저 하인에게 주고는 페이지를 자르게 한 귀족도 있고 아이들에게 용돈을 주고 페이지를 자르게 만든 어른들도 있으니 말입니다. (아래의 사진을 보면 이 책은 약 4분의 1정도만 잘라져 있습니다.) ![]() 전자책과 종이책이 서로 경쟁하는 시대에 페이지가 잘라지지 않은 불편하기 그지없는 책에 대해 이야기 하는 제가 좀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처럼 보일런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기회가 된다면 한 손에 칼을 들고 페이지를 하나하나 잘라가며 천천히 책을 읽어 보십시오. 과연 빠르고 실용적이며 또 효율적인 것만이 사람을 이롭게 하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하시게 될 겁니다. * 이 글을 올리게 된 계기는 블로그 이웃 한 분이 최근에 구입한 책에 대해 올리신 글을 보고 나서입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포스팅 계획서"^^에 포함되어 있는 주제였는데 이리저리 미루다가 마침 그 분의 글을 보고 늦기 전에 올려야 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유럽에서 출판된 고서를 구입하시는 분들은 이런 경우를 종종 보실 겁니다. 그런 분들을 위해 몇 가지 안내를 드리자면요, 이런 책의 페이지를 자를 때는 가능하다면 종이칼(Paper Knife, Letter Knife, Letter Opener) 을 이용하십시오. 면도칼처럼 너무 날카로운 칼은 손을 다치실 수도 있지만 또 페이지를 자를 때 접은 면이 아니라 종이의 다른 면을 자르게 될 확률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면이 너무 두꺼운 도구를 사용하면 페이지가 제대로 잘라지지 않지요. 종이칼이나 두꺼운 종이로 만들어진 인덱스카드 같은 도구를 사용하는 것이 가장 안전합니다. 그리고 위의 그림에서 보듯이 책을 바닥에 눕혀 놓고 자르시는 것이 훨씬 더 정확하게 자르실 수 있습니다. 손가락이나 손 날을 집어 넣어 자르지는 마시구요.^^ (아래에는 제가 지금 사용하고 있는 종이칼입니다. 몇 년 사용하다 보니 칼의 표면도 벗겨지고 많이 낡았습니다.) ![]() * 이 글을 위해 참고한 자료들과 이미지의 출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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