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생들의 독서 '편식'이 심하다는 기사가 최근 한 일간지에 보도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기사가 이 번에 처음 나온 것은 아니지요. 대학교 도서관에서 학생들이 대출해 가는 책에 관한 기사들은 잊을만하면 종종 신문에 실립니다. 그리고 최근 몇 년간 보도된 그런 기사들의 대부분은 학생들의 독서에 깊이가 없다는 것, 그리고 그들의 독서가 환타지나 무협 소설과 같은 대중적인 책에 치중되어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학생들의 독서 습관에 문제가 있음을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저는 그렇게라도 책을 읽는 학생들이 있다는 사실은 긍정적으로 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4 년간 대학 생활을 하면서 대학교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읽는 대학생들이 얼마나 되는지 생각해 본다면 그나마 도서관을 찾아 책을 빌려 읽는 학생들이 고마울 정도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도서관을 '이용'하는, 특히 열람실을 이용하는 대학생의 수는 많습니다.
이런 기사를 보면서 어떤 분들은 대학교 도서관에 환타지 소설이나 무협 소설이 왜 있느냐고 질문을 하십니다. 도서관이니 책이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그런 면에서 환타지 소설이나 무협 소설이 도서관에 있는 것도 당연한 일일런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도서관에 그런 책이 소장되어 있는 한 그런 책들이 대출 순위의 상위에 들어가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지요. 만일 대학교 도서관에 그런 대중 서적들이 있는 것이 문제라고 한다면 대학교 도서관에는 어떤 책들을 소장해야 할까요? 그리고 더 근본적인 질문을 하자면 과연 대학교에서 도서관이란 어떤 기관이어야 할까요?
대부분의 대학교 도서관에서는 도서관의 설립 목적을 이야기하면서 교육과 연구를 지원하기 위한 기관이라는 점을 들고 있습니다. '인류가 남긴 지적 유산을 수집하고 정리하고 보존'한다는 자뭇 거창한 목적도 있지만 가장 실제적이고 현실적인 대학교 도서관의 존재 이유는 바로 대학교 내에서 이루어지는 교육과 연구를 지원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책의 구입과 대출 및 기타 도서관의 여러 정책과 서비스 활동은 이와 같은 설립 목적에 맞추어 이루어져야 합니다. 만일 도서관에서 시행하고 있는 어떤 제도가 대학의 교육과 연구 활동에 장애가 된다면 당연히 고쳐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 도서관에서는 언제나 그 대학교에서 이루어지는 연구와 교육 활동에 관심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결코 그 대학 사회와 떨어질 수 없는 것이 대학교의 도서관입니다. 그것은 마치 공공 도서관이 그 지역 공동체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대학교에서 소장하고 있는 자료들 역시 그러한 대학의 교육과 연구 활동을 지원하기 위한 자료들이어야 합니다. 전에도 몇 차례 말씀드린 적이 있지만 한국의 대학교 도서관들은 연구를 지원하기 위한 도서관으로서의 역할과 함께 부족한 공공 도서관의 역할을 같이 담당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용자들이 많이 원하는 대중 소설과 환타지나 무협지 같은 책들이 대학교 도서관의 서가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지요. 당장은 열악한 공공 도서관의 현실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하더라도 이 점은 분명히 고쳐져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렇다고 대학교 도서관에서 그런 대중 서적들을 절대 구입해서는 안된다는 의미로 드리는 말은 아니니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대학에서 이루어지는 교육과 연구 활동에 따라서는 기사에서 언급된 책들 뿐만 아니라 그 보다 더 흥미 위주의 책을 구입할 수도 있습니다. 언제나 생각해야 할 것은 대학 도서관의 설립 목적이고 그 대학에서 이루어지는 교육과 연구 활동입니다.
제가 일하고 있는 올바니 대학 도서관을 비롯하여 미국의 대부분 연구 중심 대학 도서관들도 한국의 대학 도서관들과 똑같은 설립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다른 점은 그러한 설립 목적이 실무에서 적용되는 과정을 자세하고 명백한 문서로서 이용자들에게 공개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특히 위에서 제가 드린 질문과 관련해서 본다면 도서관에서 구입하는 책의 성격과 종류 그리고 형태 등에 관한 모든 것을 규정한 "장서 개발 정책(Collection Development Policy)"을 명문화하여 인터넷을 통해 이용자들에게 공개하고 또 그것에 따라 책과 기타 자료를구입한다는 점이 한국과는 많이 다르다 할 수 있겠습니다. (장서 개발 정책에 관한 용어 설명은 도서관 연구소 웹진 16 호에 실린 도서관 용어 해설 기사를 참고 하십시오. PDF 파일입니다)
일례로 제가 담당하고 있는 역사 과목의 경우도 도서관에서 구입하는 책들에 대해서 지역과 시대, 그리고 언어 등에 대해 자세하게 규정을 해 두었고 미국사에 관련된 책은 전문 연구서까지 구입을 하지만 이슬람 지역의 역사에 관한 책은 기본적인 입문서만 구입한다는 식으로 지역 및 시대 별로 구입 서적의 수준까지도 정해 두었습니다. 물론 이것은 저희 학교 역사학과에서 개설한 강의와 교수진들의 연구 내용을 검토한 후 만든 정책입니다. 역사 뿐만 아니라 다른 과목들도 마찬가지로 이런 정책을 만들어 두고 그것에 맞추어 책을 구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정책을 수립할 때에는 도서관에서 독단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해당 학과의 교수진 및 학생들에게 공개하고 의견을 수렴합니다. 아울러 이러한 정책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학과의 연구와 교육 방침이 변하는 것에 따라 언제나 바뀝니다.
이처럼 명문화된 정책이 좋은 이유로는 담당 사서가 바뀌어서 새로운 사람이 그 과목을 담당하더라도 쉽게 업무가 이어질 수 있고 가장 효율적으로 예산을 사용할 수 있다는 점을 들 수 있습니다. 관련 학계에서 출판되는 책은 엄청나지만 저희와 같이 재정이 약한, 그리고 특히 최근 몇 년간 살림살이가 피폐해진 주립 대학의 도서관으로서는 그 모든 책들을 구입한다는 것은 엄두도 낼 수 없는 일입니다. 물론 흥미 위주의 대중 서적은 꿈도 꿀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다 보니 결국 최소한의 비용으로 최대한의 효과를 얻을 수 있는 장서 개발을 해야하고 그 과정에서 명문화된 장서 개발 정책은 많은 도움이 됩니다.
이 글을 준비하면서 "장서 개발(관리) 정책"이라는 단어를 구글을 통해 검색해 보았습니다. 그것을 통해 제가 발견한 흥미로운 사실은 국내 웹싸이트들에서 '장서 개발 정책'에 관한 리포트와 논문은 많이 검색이 되는데 실제 도서관에서 사용하고 있는 장서 개발 정책은 찾기가 힘들었다는 사실입니다. 반대로 영어로 "collection development policy"를 검색해 보면 당장 검색되는 것들이 바로 실제 도서관에서 사용하고 있는 장서 개발 정책 문서들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제가 검색을 잘못 한 탓도 있겠지만 실제 한국의 도서관에서 장서 개발 정책을 문서화해서 공개하고 있는 도서관들을 찾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특히 대학교 도서관 중에서 학문 분야 별로 자세한 장서 개발 정책을 공개하고 있는 도서관은 찾지 못 했습니다. 제가 발견한 것 중에는 하남시립도서관의 장서 관리 정책이 있는데요. 장서의 관리에 대한 전반적인 규정을 소개하면서 장서 선정에 관한 항목을 만들어 어떤 책은 구입하는지 그리고어떤 책은 구입하지 않는지에 대한 비교적 자세한 내용을 소개있더군요.
한국 대학 도서관의 사정을 잘 모르면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분명 무리가 있습니다만 과연 우리 대학 도서관에서 이러한 장서 개발 정책을 만들고 체계적으로 도서관의 장서를 모으는 일이 불가능할까요? 저는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몇 가지 전제 조건이 필요하겠지요. 먼저 그 대학교에 있는 각 학과에서 이루어지는 교육 과정과 그 대학의 교수 및 연구 인력들이 수행하고 있는 연구들을 파악하고 그들에게 필요한 자료의 종류와 성격을 결정하기 위해서는 그 학문을 이해할 수 있는 사서들이 필요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대학의 주제 전문 사서 제도는 이용자들을 위한 전문적인 참고 봉사 서비스 뿐만 아니라 제대로 된 장서를 만들어 나가기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한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참고로 국내에서 최초로 주제 전문 사서제를 시작한 연세대학교 학술정보원의 웹페이지를 연결합니다. 각 전공별 주제 전문 사서 선생님들의 프로필을 주목해 보십시오.)
그러나 이에 앞서 대학교 내에서 차지하는 도서관의 역할에 대한 대학 당국의 인식, 더 나아가서는 정부의 인식이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국제적으로 경쟁력이 있는 대학, 그리고 흔히 말하는 세계 대학 순위에서 상위권에 드는 대학이 되기 위해서는 제대로 된 도서관, 연구와 교육 활동을 지원할 수 있는 제대로 된 도서관이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그러한 좋은 도서관이 없다면 제대로 된 연구와 교육이 이루어지는 세계적인 수준의 대학을 만들 수가 없습니다. 최근 대학의 국제화 바람을 타고 많은 외국인 교수들을 한국에 초빙한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해외에서 석학을 불러오고 참신한 신진 연구자들을 불러온다고 하더라도 그들이연구 활동을 제대로 할 수 있는 지원 시설을 만들어주지 않는다면 그들은 오래 머물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도서관은 그러한 연구 지원 시설 중에 가장 핵심적인 시설입니다. 대학 당국은, 그리고 특히 정부는 이 점을 깨달아야 합니다.
최종적인 도서관 정책을 결정하시는 분들께서 이용해 보신 도서관이라는 것이 고시 공부를 위해 밤낮을 보냈던 도서관의 열람실이었다고 하더라도, 그래서 그 분들이 만든 대학교 도서관 설립 규정에는 소장하고 있는 책의 권 수가 아니라 열람석의 숫자 만을 규정하고 있다 할 지라도, 도서관에는 열람실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 분들이 지금이라도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대학교 도서관에서 교육과 연구 활동을 제대로 지원할 수 있는 법과 제도를 만들어나가야 합니다. 당장 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많겠지만 그래도 이 일은 처음부터 하나하나 혁명을 하는 마음으로 시작해야 할 일입니다. 이것이 해결되지 않는 이상 우리는 언제나 학문의 변방 국가, 수입 국가로만 남아 있을것입니다.
* 미국 도서관들의 장서 개발 정책이 궁금하신 분들은 아래의 링크를 따라가 보십시오. 도서관 관종별(공고, 학교, 대학 도서관등등) 장서 개발 정책의 예를 보실 수 있습니다. 웹페이지가 업데이트된지 오래 되어서 끊어진 링크도 있습니다만 여전히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습니다.
Acqweb's Directory of Collection Development Policies on the Web
** 이 글에 쓰인 이미지는 Flickr 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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