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의보감이 유네스코에서 지정하는
세계기록문화유산(Memory of the World)에 선정되었다는 소식이 있었습니다. 기쁜 소식이지요.
이 소식을 전하는 보도에 따르면 아시아 국가 중에서는 한국에서 등록된 기록 문화 유산의 숫자가 가장 많다는 말도 아울러 전하고 있었습니다. 자랑스러운 일입니다. 유네스코의 세계기록문화유산 선정 작업은 2년에 한 번씩 이루어지는데 올 해 선정된 35개의 기록 문화 유산 중에는 우리에게 낯익은 안네 프랑크의 일기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현재까지 등록된 한국의 기록문화유산들은 동의보감을 제외하고도 훈민정음과 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의궤 등 6 가지가 더 있다고 합니다. 한국에서 그렇게 많은 기록문화유산이 등록된 것을 두고 하나도 등록되지 않은 일본과 비교하시는 분들도 있고 또 이러한 사실들로 인해 우리 나라가 '기록 강국'임을 세계 만방에 알리게 되었다고 좋아하시는 분들도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런 경사스런 일을 축하하는 것뿐 만 아니라 이 일을 계기로 우리가 생각해보아야 할 부분이 있는 듯 하여 몇 자 적어봅니다.
현재 유네스코에 등록된 우리 나라의 기록문화유산들은 최소한 몇 백년 이전의 기록들입니다. 반면 현재까지 유네스코에 의해 기록문화유산으로 등록된 기록들 중에는 상당히 최근에 만들어진 기록물들도 포함이 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올 해에 등록된 기록들 중에는 파라과이의 독재자 알프레도 스트로에스네르(Alfredo Stroessner)의 치하에서 1954에서 1989년 사이에 이루어진 각종 인권 탄압의 기록들을 모은 "
Archives of Terror" 가 있고 1930년에서 1961년 사이에
도미니카 공화국에서 이루어진 인권 운동과 저항 운동의 기록도 들어 있습니다.
그 외에도 국제 연합(
United Nations) 의 전신인
국제 연맹(League of Nations) 이 1919년에서 1946년 사이에 생산한 문서들 역시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지정이 되었고 캄보디아의
투올 슬랭 학살 박물관(Tuol Sleng Genocide Museum)에 보관 중인
폴포트 정권의 학살 관련 기록도 들어 있습니다. 당시 투올 슬랭 감옥에 투옥되었던 사람들의 사진과 잔인한 고문을 거쳐 만들어진 그 사람들의 "자백서", 그리고 사람들에 대한 각 종 신상 기록이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것이지요. 과연 이런 기록물들은 어떻게 해서 세계기록문화유산에 들어가게 되었을까요?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등록된 이와 같은 최근의 기록물들을 보면서 저는 우리가 마음 속에 가지고 있는 "기록"의 의미를 다시 한 번 더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신문 기사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우리는 세계가 부러워하는 기록, 더 정확히 말한다면, "기록 보존의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왕조실록과 같은 기록물은 다른 나라에서 찾아 보기 힘들만큼 자세하고 종합적인 기록입니다. 그런데 그런 전통이 과연 지금도 이어지고 있을까요?
사람들마다 의견에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지난 노무현 대통령 정부 동안 우리 나라의 기록 문화는 크게 발전을 했습니다. 그 사실은 노무현 대통령 자신이 역대 대통령 누구보다도 더 많은 기록을 남겼다는 점으로도 잘 나타납니다. 퇴임 이후 기록물과 관련한 일련의 공방이 있었지만 역설적으로 그 일련의 사건들은 기록물에 대한 일반인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킨 것도 사실입니다. 과연 현 정부가 물러날 때 어느 만큼의 기록을 남길지 두고 볼 일입니다만 1948년 대한 민국이 건국된 이 후 우리 정부가 남긴 기록물은 다른 나라 정부에 비하면 정말 보잘것 없는 수준입니다.
비록 전쟁을 거치며 많은 기록이 없어졌을 것이라는 점도 생각할 수 있지만 전쟁이 끝난 이 후부터 따지고 보아도 여전히 남아 있는 기록은 많지 않습니다. 공공 기관에서 남긴 기록이 그럴 정도이면 민간은 어떨까요? 근대화의 기치 아래 과거로부터 내려오는 것들은 거의 모든 것이 배척되고 타파해야 하는 것으로 간주되어 많은 것이 사라지고 또 파괴되는 수난을 당했습니다. 그 와중에서 우리 과거의 소중한 흔적인 담긴 기록들 역시 그 운명을 비껴가지 못 했다고 들었습니다. 몇 백년 전 과거의 기록은 고사하고 불과 몇 십 년 전인 70년대와 80년대의 기록 역시 제대로 관리되고 있지 않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다행히 늦게나마 기록 보존에 대한 관심이 생겨 정부에서도 법을 재정비하고 민간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각 종 아카이브 작업도 활발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본격적인 기록 보존을 이미 오래 전부터 시작한 나라들에 비해서는 아직 미흡한 수준인 것도 사실입니다. 아직 일본에서 등록한 세계기록문화유산이 하나도 없는 점을 들면서 한국 기록 문화의 상대적인 우수성을 이야기하는 분들도 보았습니다만 적어도 기록을 보존하고 그것을 많은 사람들이 이용할 수 있도록 재가공하여 소개하는 면에서 본다면 오히려 우리가 배워야 할 점이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이 점에 대해서는
헤르모드 님의 블로그를 추천합니다.)
과거의 기록을 정리하고 제대로 보존하는 일은 조상들의 화려한 문화 유산을 전승한다는 거창한 이유 때문만이 아니라 집을 사고 팔 때 남기는 계약서를 제대로 보관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것이 우리의 실제 생활에 필요한 일이기 때문에 더욱더 실천해야 할 일입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 보지요. 우리는 주위에서 수 없이 이루어지고 있는 각 종 공사 현장을 매일 목격합니다. 가스관을 매설하는 곳도 있고 또 전기선을 땅 속에 묻거나 하수도 혹은 상수도를 설치하기 위해서도 공사를 합니다. 그러한 공사의 기록이 제대로 남아 있지 않다면 어떻게 될까요? 상수도 공사를 하다가 가스관을 건드릴 수도 있고 그럴 경우 결국 큰 사고로 이어질 수도 있는 일입니다. 그런 극단적인 예가 아니더라도 과거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제대로 된 기록이 없이는 우리의 현실이 힘들어지는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기록의 가치를 잊고 있지는 않는지요? 어쩌면 그렇게 기록의 가치를 잊고 있기 때문에 좋지 않은 일이 반복되고 또 부정한 과거를 지닌 사람들이 어느 순간에 깨끗한 선량으로 탄생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제대로 된 기록 남기고 그것을 보존하는 일은 우리의 기억을 보존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런 기억에는 좋은 일에 대한 기억도 들어 있겠지만 좋지 않은 일, 그리고 우리 자신이 저지른 실수에 대한 기억도 반드시 포함이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런 실수와 잘못에 대한 기억을 잊어 버리게 되면 우리는 반드시 그 일을 되풀이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비록 그 일들이 부끄럽고 돌아보기 싫은 일이라고 하더라도 그런 일에 대한 기록이 없다면 우리의 아이들은 과거로부터 아무 것도 배우지 못합니다. 그저 우리의 과거가 자랑스러웠고 선조들은 모두 영웅들이었으며 우리 문화는 세계에 자랑할만큼 훌륭한 것이라고 우물 안에서 떠드는 개구리가 될 뿐, 우물 밖의 세계에서 살아가기 위해 정작 필요한 것은 배우지 못 합니다.
개인의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기록의 보존은 개인의 기억과 과거를 보존하는 일이겠지만 그 작업의 가치는 개인의 차원을 넘어섭니다. 그렇게 모이고 보존된 기록들은 바로 우리 사회의 기억이고 바로 우리의 역사가 됩니다. 그리고 만일 그런 작업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우리의 기억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물론 몇 십년 전에 있었던 일을 마치 어제 일처럼 말씀해 주시는 분들도 계시지만 사람의 기억이라는 것은 불완전하고 늘 변화하는 것입니다. 과연 그 분들의 기억이 정확한가를 판단하는 일은 남아 있는 기록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물론 기록 역시 왜곡되고 변조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에라도 우리는 가능한한 많은 기록을 정리하고 제대로 보존해서, 그것들을 토대로 우리의 아이들이 과거를 공부하고 그 속에서 세상을 제대로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지혜를 얻을 수 있게 해야 합니다. 우리 조상들의 기록물이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등록되는 것을 보면서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점은 바로 기록을 정리하고 보존하는 문화를 다시 한 번 더 일깨우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 이 글에 쓰인 이미지는
UNESCO 의
Memory of the World 웹페이지와
허준박물관에서 가져온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