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누구나 과거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하지만 현재 우리가 만들어가고 있는 역사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말하는 사람은 드뭅니다. 사실 이 문제는 과거의 역사 만큼이나, 어쩌면 그 보다 더 중요한 문제일지도 모르는데 말입니다. 현재 우리들이 과거에 대해 이야기 할 수 있는 근거는 역사책을 비롯한 다양한 자료들입니다. 그리고 그 책들은 다시 살펴보면 과거로부터 전해지고 있는 다양한 기록들을 토대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기록을 제대로 보존하는 것은 역사를 제대로 알 수 있는 사료들을 후대에 전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만들어내고 있는 기록은 잘 보존되고 있는 것인가요? 사회가 복잡해지면서 과거에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의 정보(기록)들이 생산되고 정보 기술의 발달로 인해 그 기록들은 싸고 효과적이라고 생각되는 디지털 저장 매체에 기록되고 있습니다. 몇 십권의 백과사전이 한 장의 씨디에 들어가는 세상이니 우리 개인이 만들어내는 기록들도 이처럼 쉽고 간단하게 저장이 가능해졌습니다. 그러나 과연 이것이 안전한 보존의 수단이 될 수 있을까요? 최근 많은 기록 보존 전문가들이 이에 대한 우려를 표시하면서 '디지털 빙하 시대'와 같은 말로 우리가 처한 위험을 경고하고 나섰습니다. 무엇이 위험하다는 얘기일까요? Popular Mechanic 이란 잡지 12월 호에 Digital Ice Age란 제목의 글을 쓴 Brad Reagan는 아주 흥미로운 예를 들어 우리가 처한 위험을 이야기해 주고 있습니다.
1086년 영국의 정복왕 윌리엄(William the Conquerer)은 자신이 새로이 정복한 토지에 세금을 부과하기 위한 사업의 일환으로 영국 전역에 걸친 토지 조사 사업을 합니다. 이 사업의 결과물로 인구와 토지 및 가축의 현황까지도 포함하는 상세한 토지 대장이 작성되었는데 이것을 둠즈데이북(Domesday Book) 이라고 부르고 이 대장은 오늘 날까지 보존되어 당시의 상황을 살피는 중요한 사료가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최초의 둠즈데이 북이 나온지 900년이 되는 1986년 BBC 에서는 둠즈데이 북의 탄생 900 주년을 기념하여 현대판 둠즈데이북을 당시의 최신 기술을 이용해 만들었습니다. 문서 기록 뿐만 아니라 사진과 각 종 멀티 미디어 자료까지 포함시켜 당시로는 최첨단의 기술이던 레이저 디스크에 자료를 보관했습니다.
그러나 불과 채 20년도 지나기 전인 2002년 BBC 에서는 이 현대판 둠즈데이북에 치명적인 결함이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정보 기술의 발전이 워낙 빠르다 보니 레이저 디스크 속에 담긴 자료들이 구식이 되어 버린 것이지요. 예를 들어 1986년에 디지털로 옮겨진 사진들은 현재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JPEG 포맷이 나오기 전의 포맷이라 읽어내는데 상당한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더 이상 2002년의 컴퓨터로는 이 자료들을 읽기 힘들다는 것을 발견하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새로운 프로젝트를 시작했다고 하는 군요. 한편, 900여년 전에 만들어진 원래의 둠즈데이북은 여전히 잘 보존되어 있고 사람의 눈으로 쉽게 읽어낼 수 있습니다. 현대인들의 지식과 기술이 900여년 전의 중세인들에 비해 많이 뒤떨어져서인가요.
영국에서 일어난 이 일은 언듯 보기에 우리와는 거리가 먼 문제인것 같지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종이없는 사무실, 전자 정부, 전자 서명, 온라인 거래 등등 우리 생활의 많은 부분이 가상의 디지털 공간에서 이루어지고 0과 1로 된 데이타 이 외에는 그 어떤 가시적인 기록도 존재하지 않는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몇 년간 찍은 사진과 동영상이 하드 디스크속에 보관이 되어 있고 그것들은 잠깐의 부주의로도 아주 쉽게 파괴되거나 지워질 수도 있는 것입니다. 한 번 물리적인 충격을 받은 하드디스크를 다시 복구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결국 하드 디스크 속에 담긴 한 개인의 과거가 송두리채 지워지는 것이지요.
"자주 백업 받아 놓으면 되지." 하시는 분들도 계시겠지요. 하지만 그런 식으로 해서 얼마나 오래 보관 할 수 있을까요? 물론 개인의 자료는 개인의 필요에 따라 지워버리면 그만이라고 하시겠지만 정부나 관공서, 혹은 회사의 공문서들은 어떨까요? 서류의 기안에서부터 결재에 이르기까지 전자적으로 이루어지고 보관도 파일로 해 놓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부서 간의 업부 조율이나 회의도 이메일을 이용하거나 온라인 채팅을 이용해 이루어지기도 한다는데 이러한 자료들을 다 보관하고 계십니까? 물론 공식 기관에서는 이 모든 것들을 보관하겠지요. 하지만 보관만 하는 것이 다는 아닙니다. 장차 필요에 따라 이것들을 다시 사용할 수 있는 상태로 보관을 해야 하는데 이것이 말처럼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혹시 '보석글' 이라는 도스용 워드 프로세스를 기억하십니까? 80년대 말 쯤 아래아 한글이 나오기 이전에 나왔었나요? 한 동안 관공서에서는 이 프로그램을 이용해서 모든 문서를 작성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만일 이 보석글로 만들어진 문서를 지금 읽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할까요? 그리고 5.25 인치 플로피를 기억하십니까? 워낙 약하다 보니 외부 충격에 따라 자주 에러도 발생하고 못 쓰게 된 것을 책갈피로 사용한 기억도 있습니다. 한 동안 3.25 인치 플로피와 같이 사용되더니 이제는 3.25 인치 플로피 드라이저마저도 사라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제가 지금 하고 있는 이 이야기는 지난 20년 이내에 일어난 일들입니다.앞으로 200년 아니 100년 이 후에는 어떻게 될 지 짐작되십니까?
적어도 종이로 만들어진 책이라는 물건은 적당한 관리를 한다면 몇 백년간 보관이 가능합니다. 그리고 몇 백년 후에도 여전히 사람의 눈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0과 1로 이루어진 디지털의 세상에서는 보관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읽어내는 것은 더 큰 문제입니다. 책이 몇 백년간 보관가능하다는 것은 이미 실례로 증명이 됩니다. 하지만 아직도 CD나 기타 디지털 저장 장치가 얼마나 오래 자료들을 보관할 수 있는 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그저 이론적으로 50년이다 100 년이다 이야기할 뿐이지요. 이와 함께 그러한 저장 장치들을 읽어내는 하드 웨어들도 문제입니다. 60년대 베트남에서 미국 공군이 남긴 비행 기록들은 당시에 모두 디지털화 되어 지금은 도저히 읽어 낼 수 없는 저장 장치에 기록된 채 보관되어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예는 이미 오래 전에 전산화 과정을 거친 미국의 곳곳에서 찾아 볼 수 있는 현상입니다. 결국 이러한 사건들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가 역사 속에서 지워질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후대가 전혀 읽을 수 없는 기록들만을 남기게 되니, 그들에게 우리는 우리 조상들의 시대보다 더 신비에 싸인 세대가 될 지도 모릅니다.
이러한 문제에 대해 아직 정답은 없습니다. 많은 학자들이 다양한 이론을 내 놓고 있고 그러한 연구를 바탕으로 최근 미국 국립 문서 보관소에서는 전자 자료들을 보존하기 위한 방대한 프로젝트를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완벽한 해결책이 될런지는 누구도 모르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 이라도 시작하지 않으면 너무 늦어버릴 수도 있는 일이니 하루라도 빨리 시작하고 계속해서 고쳐나가야 하겠지요. 한 번 사라진 과거를 다시 복원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세계 최고의 IT 강국이라는 한국의 정부 역시 이런 문제에도 관심을 가져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마 일반인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아서 그렇지 열심히 노력하고 계시겠지요. 물론 기록보존법(“공공기관의 기록물관리에 관한 법률")이 정부 수립 후 50여년이 지난 2000년에야 본격으로 시행되기 시작했지만 말입니다.
* 다음 글에서는 개인이 할 수 있는 자료들을 보존에 관해 이야기 해 보겠습니다.
* 이 글을 위해 참고한 글과 웹싸이트 그리고 이미지의 출처입니다.
- 국사 편찬 위원회
- Breeding, M. (2002). Preserving Digital Information. Information Today, 19(5), 48
Wiggins, R. (2001). Digital preservation Paradox & Promise. Library Journal, 126(7),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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