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한 화가가 그린 보통 사람들(2)
앞의 글에서 소개해 드린 록웰의 그림들은 미국 사회의 일상 중에서 밝고 아름다운 모습들을 그린 것 들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삶이 그렇듯 세상이 아름답기만 한 것은 아니지요. 오히려 어둡고 추한 모습들이 더 많아 보이는 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입니다. 록웰이 살았던 20세기 초반의 세계는 더욱 그러합니다. 그 이전 세기에서는 볼 수 없었던 전쟁과 대량 학살 그리고 그로 인해 무수한 사람들의 피와 눈물이 흐른 시기가 바로 20세기 초반 입니다. 물론 20세기 후반이라고 해서 크게 달라졌다고 볼 수 는 없겠지요.
록웰이 살았던 미국은 그런 면에서는 축복받은 나라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두 차례에 걸친 세계 대전의 대부분이 세계의 다른 지역에서 치러졌고 비록 미국 역시 인적인 손실을 겪었지만 결국 그 두 전쟁으로 인해 미국은 지구 상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는 나라로 떠 오릅니다. 록웰의 그림 속에 나타나는 여유있고 안정된 미국의 모습은 어쩌면 이러한 전쟁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라 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그러한 안정 속에서도 미국이라는 나라가 가진 문제점들은 늘 존재해왔었고 그것이 50년대 말과  60년대를 거치며 나타나게 됩니다.

웬지 이거 좀 따분한 역사 강의가 되는 것 같습니다.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록웰의 그림이 풍요롭고 안정된 미국의 모습만을 그리고 있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인생의 후반기에서 록웰은 그림을 통해 적극적으로 사회에 참여한 예술가 이기도 합니다. 물론 상업적으로 성공을 거둔 록웰의 그림들에서, 특히 Saturday Evening Post 의 표지에서 흑인을 찾아 볼 수 없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록웰이 인종차별주의자였기 때문이 아니라 그 잡지의 편집 방침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흑인 민권 운동이 한창이던 60년대에 록웰은 그림을 통해 적극적으로 자신의 생각을 알려나갑니다.

일반적으로 삽화가라고 하면 미리 주어진 내용에 맞게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록웰은 삽화가의 수동적이고 제한적인 그림을 뛰어넘는 작품들을 남긴 사람이라 볼 수 있습니다. 즉, 남의 이야기에 그림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그 이야기를 한 장의 그림으로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것이지요. 일상적인 상황을 그린 그림 속에서도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 낼 수 있는 록웰 만의 뛰어난 능력 덕분에 우리는 그의 그림 속에서 여러 가지를 생각하고 또 많은 질문을 던질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위에 소개한 1959년 작 "배심원실(Juror Room)"을 보시면 배심원단들이 사건에 대해 논의를 하는 과정에서  단 한 명의 여성이 다수의 남성들에게 둘러싸여 설득(?)당하고 있는 장면을 보실 수 있습니다. 페미니즘과 관련해서 이 그림을 본다면 이 그림은 당시 여성들의 위치를 보여준다고 볼 수도 있고 그것을 그림으로 옮긴 록웰의 의도는 과연 무엇이었는지 여러가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여성의 바로 뒤에서 고개를 내밀고 내려다 보고 있는 사람은 바로 록웰 자신인 것 같기도 합니다. 아래에는 수 백 마디의 말보다 한 장의 그림으로 이야기를 전한 록웰의 그림들을 몇 점 소개합니다.
1943년에 그린 '리벳공 로지(Rosie the Riveter)'는 2차 대전 동안 남자들이 떠난 공장에서 남자들이 하던 일들을 하던 여성을 그린 그림입니다. 우람한 팔뚝과 무릎 위에 놓인 묵직한 공구에서 이 여성의 힘이 느껴지십니까? 그러면서도 붉은 머리와 입술 그리고 통통한 빰에서는 여성스러움이 여실히 드러납니다. 점심을 먹고 있는 그녀의 발 아래에 놓은 것은 히틀러의 책 '나의 투쟁(Mein Kampf) 입니다.
히틀러의 책을 밟고 앉아 씩씩하게 공구를 들고 일하는 여성의 모습(물론 그림에서는 점심 식사 중입니다.) 에서 전쟁을 치르고 있는 미국의 여성들이 살아가는 모습이 보입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전하는 메세지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이 그림은 이 후에도 여성의 권리를 신장하는 각 종 사회 운동에서 상징처럼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이 그림에서 로지가 취하고 있는 자세는 미켈란젤로의 천정화인 천지 창조에서 등장하는 예언자 이사야를 모델로 한 것이기도 합니다. 아래에 보시면 분명한 공통점을 보실 수 있습니다.
1941년 유럽에서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일때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은 전쟁 이후의 세계에 대해 말하며 언론의 자유, 신앙의 자유, 빈곤으로부터의 자유, 공포로부터의 자유 라는 4 가지 자유에 대해 언급합니다. 이것은 훗날 대서양 조약의 바탕이 되는데 2차 대전 중이던 당시 미국은 루즈벨트 대통령의 이 생각을 적극적으로 홍보하기 위해 많은 예술가들을 고용하였습니다.

일설에 의하면 록웰은 루즈벨트 대통령의 이러한 연설에 큰 감명을 받았고 자진해서 그것들을 그림으로 옮기려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미국 정부에서는 록웰이 '진정한 예술가가 아니라 삽화가일 뿐이다' 라고 하며 록웰의 제안을 거부했다고 하는군요. 하지만 Post 지에서는 록웰의 그러한 생각을 높이 평가하고 한시빨리 작품을 완성시켜 줄 것을 부탁하고 결국 그 그림들은 Post 지의 표지로 실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그림들이 정부에서 고용한 화가들의 작품들보다 훨씬 더 사람들의 마음에 와 닿았고 이것을 본 정부에서도 그제서야 록웰의 그림을 정부의 각종 포스트에 적극적으로 활용했다고 합니다.

위에 소개한 그림은 "언론의 자유(freedom of speech)" 라는 제목이 붙어 있습니다. 마을의 회의에 참석한 한 사람이 일어서서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있는 순간을 포착한 것인데요. 이 사람의 굵은 손 마디와 입은 옷으로 보아 결코 사회의 상류층은 아닌것 같습니다. 하지만 마을의 회의에서 당당하게 자신의 의견을 이야기 하고 있고 다른 사람들은 이 사람의 의견을 경청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이 언론의 자유, 자신의 의견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사회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는 것이지요.
이 작품은 전시 공채(War Bond)를 팔기 위한 포스터에 사용되어 일반인들에게 표현의 자유를 일깨우고 결국 미국의 전시 공채 판매에 큰 기여를 하였다고 전해집니다.


2차 대전이 끝난 후 미국은 승전국으로서 명실상부한 세계 최강의 국가로 떠오릅니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미국 사회 속에 잠재된 각종의 모순들이 50년대와 60년대를 거치며 나타나게 됩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흑인들의 민권 운동입니다. 이러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 록웰은 자신의 생각을 그림을 통해 강하게 표현합니다. "우리 모두와 함께 살아가고 있는 문제(The Problem We All Live With)" 라는 1964년 작품은 이 시기의 대표작 중 하나입니다.
위의  그림은 1960년 뉴올리언즈에서 실제 있었던 사건을 모티브로 한 그림인데요, 루비 브리지스(Ruby Bridges)라는 6살 된 소녀는  정부의 학교 통합 시책에 따라 당시까지 백인들만 다니던 공립 학교에  입학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것을 반대하는 백인 학부모들이 학교 가는 길을 막고 데모를 합니다. 그래서 이 소녀를 보호하기 위해 연방 보안관(Marshal)들이 나서서 소녀를 학교까지 호위하는 장면입니다. 

벽에 쓰인 검둥이( Nigger)라는 글씨가 보이고 터져버린 토마토는 마치 누군가가 흘린 피처럼 보입니다. 일부러 얼굴을 보이지 않게 그려진 연방 보안관들 사이에서 걸어가고 있는 루비의 흰 옷과 흰 운동화 그리고 검은 피부가 미국 사회에 존재하는 흑백의 차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록웰은 왜 루비를 네 사람의 가운데가 아니라 앞에 치우치게 그렸을까요? 그리고 왜 연방 보안관들의 얼굴을 보이지 않게 그렸을까요? 아래에는 루비 브리지스의 실제 사진입니다.
루이 브리지스의 이야기와 같은 주제의 또 다른 그림이 아래에 있는 1967년 작품 '이웃의 새로운 아이들(New Kids in the Neighborhood)" 입니다.
백인들이 사는 동네에 흑인 가족이 이사를 옵니다. 그리고 새로 이사온 흑인 남매를 동네 백인 아이들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 아이들 사이에서는 어떤 대화가 오고 갔을까요? 멀찌감치 마주보고 있는 이들 사이의 간격은 흑인들과 백인들 사이의 거리를 의미하는 것이겠지요. 어쩌면 이 아이들의 관계는 흑인 소녀가 들고 있는 흰 고양이와 백인 아이들이 데리고 온 검은 강아지 만큼이나 친해지기 어려운 사이였을런지도 모르겠군요.

흑인 민권 운동은 단순히 목소리 높여 연설하고 행진하는 것만이 아니었습니다. 그 속에는 자신들이 믿는 것을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람들의 피와 그 가족의 눈물이 또한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일전에 소개해 드린 마틴 루터 킹 목사도 그러하지만 1964년 6월 미시시피 주에서 흑인들의 선거등록 운동을 하던 3명의 민권 운동가들 역시 그와 같은 희생자들입니다. 우리에게는 '미시시피 버닝' 이라는 영화로 소개되기도 했던 이 사건은 지역의 KKK 단원들이 이들 민권 운동가들을 살해한 사건인데 그 재판과정이 부당하여 또 한 번 화제가 되기도 했던 사건입니다. 1965년에 그린 록웰의 '미시시피의 살인 혹은 남부식 정의(Southern Justice or Murder in Mississippi)" 는 바로 이 사건을 주제로 한 그림입니다.
기존에 보아온 록웰의 그림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의 이 그림에서 당시의 상황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미 목숨이 끊어져 바닥에 엎드린채 죽어 있는 한 사람과 피를 흘리며 동료에게 의지하고 있는 흑인, 그리고 이 흑인을 부축하며 자신에게 다가오는 살인자들을 직시하고 있는 사람의 모습에서 당시 남부의 흑인들이 처해 있던 상황이 전달되고 있습니다.

그림자로만 그려진 살인자들의 모습이 오히려 그들의 사악함을 더 강조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검은 그림자들은 어두운 배경 속에서 살인자를 직시하며 서 있는 남자의 흰 셔츠와 밝게 드러난 얼굴과 대비되면서 이들 민권 운동가들이 믿고 있는 정의가 얼마나 올바른 것인지 상징적으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위에 소개한 루비의 그림과 함께 이 그림은  Look 이라는 잡지의 표지로 소개되었다고 하는데요. 이 잡지사에 협박 편지가 오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독자들은 이 그림을 통해 당시의 상황을 더욱더 생생하고 절실하게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수십 페이지의 기사보다도 이 한 장의 그림이 사실을 전달하는데 더 힘을 발휘했다는 것입니다.

록웰은 1978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죽기 전에 자신이 가지고 있던 그림들을 모두 모아 재단을 만들고 말년에 자신이 살던 메사추세츠주의 스톡브리지(Stockbridge)에 미술관을 세웁니다. 지금도 이곳에 가시면 그 미술관을 관람하실 수 있지요. 그리고 스톡브리지에 오기 전 록웰이 거주했던 버몬트 주의 알링턴(Arlington)에도 미술관이 있습니다. 혹시 록웰의 그림에 관심이 있으신 분은 위의 두 곳을 방문해 보시면 좋습니다. 상업적으로 많이 퍼진 그림들이지만 원본을 보시면 예술가로서의 록웰에 대해 재인식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겁니다. 특히 가을에 스톡브리지의 록웰 미술관을 방문하시면 그림과 함께 뉴잉글랜드의 단풍을 만끽하실 수 있습니다. 물론 버몬트 주의 단풍도 두말할 나위가 없지요. 아래의 사진은 스톡브리지의 록웰 미술관입니다. 대형 걸게로 걸린 리벳공 로지의 그림이 보이십니까?
*이 글을 위해 참고한 자료들과 이미지의 출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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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lio | 2007/03/05 11:45 | 그림이야기 | 트랙백(1) | 핑백(1) | 덧글(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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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poooch at 2007/03/05 12:15
록웰의 그림은 엽서로 몇 장 가지고 있었는데, 이런 그림들은 처음 보네요.
기회가 된다면 미술관에 가서 직접 그림을 보는 것도 좋을 것 같군요. 그림과 함께 아는 재미를 느끼게 해주시는 clio님의 글.. 오늘도 잘 읽고 갑니다 ^_^
Commented by marlowe at 2007/03/05 13:11
진짜 예술가였군요.
Commented by 짜로씨 at 2007/03/05 22:26
안그래도 지난번에 소개해주신 글을 읽다가 출처사이트에 가서 이 그림들을 보고는 궁금했었는데..
특히 인종간의 갈등을 다룬 그 그림의 벽에 토마토를 저는 피로 봤었습니다.(화면을 작게하고 보니 토마토가 안보여서)그래서 그림만 보고 의아해하다가 크게 보고는....^^;;암튼 오늘도 잘 보고, 느끼고 갑니다~
Commented by kristine at 2007/03/06 06:30
3월의 이미지 사진이 재미나네요.. sforza 가 맞지요? 처음에는 체사레 보르지아 아니냐고 질문할려다가 체사레 치곤 넘 못생겨서..
Commented by 꼬부기T at 2007/03/06 13:36
앞의 포스트와 함께 이 그림을 보니 미국의 빛과 그림자를 보는 듯합니다. 미국도 저런 고통의 과정을 겪고 나서 지금의 부강함을 이루었다고 보면 우리에게 있는 지금의 힘듦도 미래의 자양분으로 볼 수 있는 것일지 아닐지... 조금 망설이게 됩니다만, 미래 시점에서야 알게 되겠지요. 우리 자식들이나 알 수 있을 지 모르겠습니다. 마지막 그림에서 87년, 이한열이 피 흘리며 친구에게 안겨 있던 모습이 담긴 걸개그림을 떠올리게 됩니다. 구도상 매우 유사하게 보이는데 어떨까 모르겠네요. ^^ 좋은 글과 그림을 잘 보고 갑니다.
Commented by Clio at 2007/03/06 14:17
poooch 님 / 꼭 한 번 원본을 보시기 바랍니다. 복제 기술이 발달하여 거의 원본에 가깝게 재현해내고 있지만 원본을 볼 때의 느낌은 따라 갈 수가 없지요.

marlowe 님 / 예술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다른 의견이 있겠지만 록웰은 예술가였다고 저 역시 믿고 있습니다.

짜로씨 님 / 잘 보고 느끼고 가신다니 저도 기분이 좋습니다. 토마토이기는 하지만 피처럼 보이려 한것이 록웰의 의도가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그런면에서 본다면 짜로씨 님이 받으신 느낌이 바로 록웰이 원하던 것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kristine 님 / 정확히는 스포르짜 가문의 사위입니다. 그림 속의 인물은 이탈리아 중부의 도시 우르비노의 공작이었던 페데리토 다 몬테펠트로(Federico da Montefeltro) 입니다. 그의 두번째 부인이 스포르짜 가문의 Battista Sforza 이지요. 본인은 잔인한 용병 대장이었지만 르네상스 시기의 대표적인 Patron 중의 한 사람입니다. 로고로 쓰인 그림은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의 작품이구요. 그의 아내 바티스타 스포르짜의 초상화와 함께 한 쌍으로 많이 소개되고 있지요. 이 그림과 관련해서 르네상스 역사를 포스팅할 것이냐 아니먄 그림에 관한 포스팅을 할 것이냐 목하 고민 중 입니다. ^^

꼬부기T 님 / 이한열의 모습이 담긴 걸개 그림을 잊고 있었군요. 이한열을 그린 그림에서는 두 사람의 얼굴이 모두 정면으로 드러난 것에 비해 록웰의 그림에서는 옆모습만 드러나는 것이 차이라고나 할까요. 하지만 분명 두 그림에 비슷한 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잊고 있던 것들을 일깨워 주셔서 감사합니다. 비록 몸은 미국에 있고 미국의 그림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만 저 자신의 뿌리는 언제나 지울 수 없는 것이지요. 갑자기 예전 로마의 판테온 천정을 보았을 때 사진으로만 본 석굴암의 천정이 떠올랐던 기억이 납니다. 현재의 제 위치와 저를 여기까지 만들어온 뿌리, 이 두가지를 모든 면에서 잘 조화시키고 싶은데 쉬운 일은 아닙니다.
Commented by kristine at 2007/03/06 15:09
스포르짜 사위도 도 디게 못생겼네요... 오히려 로렌조가 미남으로 보입니다. 미남 쿠엑.... 그래도 역사상 인물중에서 가장 맘에 드는 남자를 고르라면 로렌조가 몇손가락 안에 들어가지요...
Commented by Clio at 2007/03/07 07:22
kristine 님 / 그나마 왼쪽 얼굴은 나은 편이라고 전해집니다. 오른 편은 젊은 시절 전쟁터에서 입은 상처 때문에 눈을 잃고 아주 큰 흉터가 있었다고 하는군요. 그래서 현재 남아 있는 이 사람의 초상화는 모두 그의 왼쪽 얼굴만을 그린 것들 뿐이지요.
Commented by kristine at 2007/03/07 09:53
아유 불쌍해라.... 그 남자랑 같이 살던 스포르짜의 딸이 불쌍하네용...
Commented by Clio at 2007/03/07 16:40
kristine 님 / 13살때 35 살이던 남편과 결혼해서 26세에 산고로 생을 마친 그녀의 인생을 생각하면 더 안타깝습니다. 결혼 역시 정략적인 결혼이었을테구요.
Commented by kristine at 2007/03/07 18:12
음.... 그 시절에는 그것이 지배층의 일상적인 방식이었으니까요. 제 기억이 맞다면 이자벨라 데스테의 여동생이 스포르짜 집안과 결혼을 해서 비슷한 일생을 마무리한것으로 아는데.. 베아뜨리체 데스테.. 그 시절에는 도대체 부부의 정이라는 것이 어떤 것이었는지, 현대의 그런 모습과 조금이라도 비슷한지 궁금할때가 많아요.
Commented by Clio at 2007/03/08 08:37
kristine 님 / 권력자나 재력가들끼리 결혼을 통해 자신들의 입지를 더욱 공고하게 굳히려는 시도는 지금도 볼 수 있지요. 그런데 매우 흥미로운 주제입니다. 한 번 찾아 봐야겠군요. 과연 르네상스 시기의 결혼과 부부 생활은 어떠했는지.. 북아프리카와 스페인 여행이 끝나시면 뱃머리를 다시 서쪽으로 돌려 일 마니피코의 고향으로 놀러 가시겠습니까? ^^
Commented by kristine at 2007/03/08 09:56
삐렌쩨, 로렌조, 메디치, 루끄레찌아 보르지아, 체사레 보르지아, 그리고 이사벨라 데스떼등은 저의 중요한 theme 이랍니다. 우연한 만남이었지만 오페라를 들으면서 알게 되었어요. 가끔 다른 분야를 개척하기도 하지만 언제나 피렌쩨, 로렌조로 돌아가곤 해요.
Commented by Clio at 2007/03/09 13:30
kristine 님 / 반갑습니다. 그 사람들과 그 시기는 제게도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비록 현실적인 여건 때문에 차선을 택하긴 했지만 제대로 역사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처음 했을 때 제가 공부하고 싶었던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잊혀지지 않는 첫사랑의 추억처럼 늘 머리 속에(아마도 마음 속에) 남아 있는 시기입니다. 이래저래 참으로 흥미로운 시기이지요.
Commented by 단미 at 2007/04/25 18:22
좋은책 한권 다 읽은 기분이군요.. 감사합니다.종종와서 읽어보게 링크 업어갑니다.
Commented by Clio at 2007/04/26 04:37
단미 님 / 저도 그림 구경하러 자주 놀러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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